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박상률)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작품을 찾다 작가의 '눈을 감는다'를 읽었다. 

주인공 '나'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죽는 것밖에 없는 안타까운 사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5.18 광주학살에 대한 양심선언으로 군대에서 쫓겨나 정신까지 나가버렸을 때도 내 몫의 인생을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며 절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학교에서 생활할수록 보잘것없고 찌끄러기가 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왜소한 체격에 공부도 못하고 사교성도 떨어져 친구들을 만들지 못한 '나'의 문제일까? 아니면 '나'를 희생양으로 삼아 학급의 실세가 되려는 반장의 이기심 때문일까? 자기들이 희생양이 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그놈들의 짓을 묵인하거나 방조하는 학급 아이들이 무제일까? 아니면 직업군인이면서 명령에 따라 민간인을 학살했던 일을 양심선언 해 불명예제대를 하고 집안을 망하게 한 아버지가 문제일까? 민간인을 학살하고도 장관, 국회의원에 대통령까지 꿰차는 부조리한 사회가 문제일까?

부조리한 사회문화가 부조리한 학교문화로 이어져 '나'에겐 어둠만 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최후의 선택만이 남아 있는 '나'. '나'를 어둠에서 구조할 골든타임도 여러 번 있었다. 바로 안전한 학교,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구성원들의 양심과 정의감, 이를 위한 실천과 연대가 그것이다.

 

이 작품 외에도 현실의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청소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가장이 된 청소년, 첫사랑의 마음을 담아 쓴 시집으로 고백했으나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방황하는 청소년, 동성을 사랑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청소년, 사나운 개도 한 번의 눈빛으로 눌러 버리는 무서운 아빠지만 딸만은, 청소년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청소년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읽으면서 작가의 "나는 아름답다""방자 왈왈"이 떠올랐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청소년과 학교에서 하는 공부만 공부가 아니라, 세상이 공부이며, 특히 사랑은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큰 공부라는 작가의 생각이 이 작품집에서도 느껴졌다.

 

<이제 됐어?>

(8) '수학 끝났니? 그럼 피아노 갔다가 수영장으로 가!'
친절하게도 엄마는 초등학교 때부터 휴대전화로 내가 움직여야 하는 동선을 챙겨주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리모컨으로 조종당하는 물건 같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내가 마치 엄마의 애완용 강아지나 로봇 인형 같기만 한 것이다. 특히나 엄마가 문자로 지시 사항을 수시로 보내는 탓에 언제부턴가 휴대전화에 '엄마' 대신에 '또 뭔데'라는 이름으로 저장해 두고 있다.

(22) 어쩌면 나는 아빠 대신 공부를 하는지도 몰랐다. 나 스스로는 공부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아빠가 엄마한테 면막을 받는 건 싫다. 내가 공부라도 잘해야 아빠를 향한 엄마 신경질이 덜하다는 걸 안다. 그러니 내가 어찌 공부를 안 할 수 있으랴. 그런 내가 한심하기는 하다. 사라져버리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사라져도 엄마가 바라는 대로 해주고 나서 사라져야 한다.

 

✎ 싫다고 말하는 게 이렇게 어렵다. 공부가 그렇게 좋고 출세가 그렇게 좋으면 엄마나 할 일이지.

 

 

<세상에 권뿐인 시집>

(37) 막연히 내 멋대로 세상에 대해 내뱉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을 두고 절실하게 애를 태우는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그때부터 나는 연애 감정보다 더 소중한 감정은 이 지상에 없는 거라고 여기며 열심히 연애시를 써 갈겼다. 어느 순간이 지나자 연습장에 따로 쓸 필요도 없었다. 공책 한권을 마련하여 일련번호까지 매긴 뒤 바로 시를 썼다. 며칠 지나지 않아 공책 한 권이 아주 감동스런 연애시로 그득해졌다. 다시 읽어봐도 구구절절이 명시였다.

(53) "이건 현아 아니면 누구에게도 소용없는 시야. 여기 들어 있는 시는 현아한테만 어울리게 쓰인 것이거든. 현아 남편이 된 그 친구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나한테 다시 되돌려주지도 못하고 없애버리지도 못한 거야. 그러니 시를 쓴 나도 주인이 아니야. 그럼...

 

✎ 첫사랑의 감정에 오롯이 몰입했을 주인공이 떠오른다. 그래서 많이 흔들렸지만 아쉬움도 없었을 것 같다. Carpe diem!

 

 

<가장의 자격>

(70) 증조할머니처럼 한 세기 가까이 사는 사람도 있지만 아빠처럼 반세기도 못 사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나의 명줄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까?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그걸 안다면 재미없더라도 학교를 계속 다니든, 돈벌이에 본격적으로 나서든, 안정된 생활을 위해 살림을 차리든, 결정하기가 훨씬 쉬울 텐데..

 

✎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운명이라면, 막연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미룰 수 없지 않을까. 문명이 진화했다는 21세기 청소년들이 더 답답하게 학교에 붙들려 청춘을 보내고 있다는 주인공의 탄식에 깊게 공감이 간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만이 진짜 공부일까. 청소년 아르바이트 현실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눈을 감는다>

(97) 어쩌면 나는 이대로 내가 더 망가지고 짓밟히는 게 싫은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쯤에서라도 정말로 나를 보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실은 나를 진정으로 보호하여 더 망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한강 다리까지 온 것이다.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뿐이다. 지금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이렇게 내 발로 올라와 있는 것이다.

 

✎ 죽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이 글을 정리하는 오늘도 악플에 시달리던 연예인 한 사람이 생을 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적어도 학교가 사회의 축소판이 되는 불편한 현실은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란다. 부조리한 사회문화가 부조리한 학교문화로 이어져, 학교가 부조리를 재생산하는 구실을 하지 않기를 새삼 바란다.

 

 

<너는 깊다>

(114)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나는 그때부터 사는 일에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게 어이없다고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들어간 나는 겉돌기 시작했다. 아빠 없이 자식을 키우는 엄마의 바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내 맘이 내 뜻대로 되지 앟는데 난들 어쩌란 말인가.

(124)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따라 점점 그녀 안으로 깊이 빠져들어갔다. 그녀 안에서 나는 돌아가신 아빠를 느꼈고, 나를 믿는 엄마를 느꼈고, 말 한마디로 할 말을 다한 중학교 때 반장 아이를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느꼈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미처 모르던 나. 이제야 비로소 나를 느낀 것이다. 그녀 안에서 깊어진 것이다.

 

✎ 공부에 소질과 재미가 없는 3 여고생. 젊고 예쁘고 멋있는 원어민 영어교사를 만나자 모든 달라진다. 그녀를 좋아하고 운명적인 만남으로 생각한다. 무료했던 삶에서 그녀를 만나며, 사랑에 눈뜨며, 채웠다. 완전해졌다?

 

 

<국민건강영향보급업자가 낚지 못한 것>

(142) '요것들이 시방 개만도 못하네. 개들은 내가 가믄 열이면 열 모두 꼬랑지 내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 꿇는디 요것들은 꼼짝을 안 허네. 하긴, 내가 개 백정이제 사람 백정이냐. 사람들이 나를 무서워할 까닭이 어디 있겄냐. 눈 딱 감고 그냥 지나가자.'

 

✎ 개가 아니고 사람이니까. 다른 글에 비해 별 공감이 되지는 않는다.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
국내도서
저자 : 박상률
출판 : 특별한서재 2019.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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