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긴 꽃잎(이사벨 아옌데)

 

세계 단편 읽기로 시작한 여정이 미국의 샬럿 퍼킨스 길먼, 영국의 도리스 레싱을 거쳐 이사벨 아옌데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스페인과 칠레 두 나라를 동시에 만나게 되면서 더욱 흥미진진하고 행복한 독서가 되었다. 예전부터 익히 들어왔던 스페인 내전의 참혹함을 일부나마 간접 경험하게 되었고, 칠레로 망명해 힘겹게 살아간 스페인 사람들의 이야기도 절절하게 다가왔다. 
솔직히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는 스페인 내전과 칠레 망명, 칠레의 민주화 역사는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런데 스페인 내전에 마음 아파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다시 칠레로, 칠레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스페인 망명자들의 지난한 삶을 응원하게 만든 건 작가 이사벨 아옌데의 필력 덕분일 것이다. 

 

주인공 빅토르와 가족들, 사랑하는 로세르와 마르셀, 그리고 칠레에서 만난 주변 인물들과 엮어내는 삶의 이야기들이 역사의 혼란과 소용돌이 속에서도 어떻게 인간의 존엄과 사랑을 잃지 않고 살아남는지 보여주는 한 편의 장편 영화와 같았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거의 한국적인 클리셰가 강해서 어쩌면 한국 드라마 같기도 했다. 예를 들어, 힘든 수용소 생활 속에서 우연히 재능을 발휘해 위기를 모면한다든지, 가장 행복한 순간 암에 걸린다든지, 새로운 핏줄의 등장과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는 것으로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장면들은 분명 어디선가 많이 본듯해서 그동안 그토록 고생했던 주인공에게 작가가 일부러 선물처럼 이야기를 만들어 준 것은 아닌가 오해가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작가의 해설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며 스페인 내전이 비참한 역사로만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일처럼 달려와 목숨을 걸고 싸운 해외 여러 나라 지성인들의 우정과 헌신, 파블로 네루다를 비롯한 칠레 국민들의 이방인들에 대한 포용은 감동 그 자체였다. 이 책을 다 읽은 날 마침 서울을 방문했는데, 광화문 교보 문고에서 네루다 시집 두 권을 샀다. 아직 읽을 엄두를 못 내고 있지만, 책꽂이에 세워져 있는 것만으로 뿌듯하다. 대신 이 책의 서문에 실린 네루다 ‘귀환’의 시 구절 “이방인들이여, 이곳이, 이곳이 나의 조국이라오. 이곳에서 내가 태어났고, 이곳에 내 꿈이 머물고 있으니.”는 읽을 때마다 마치 내가 스페인 망명자가 된 것처럼 전율이 흐른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장점은 여성 캐릭터들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버려지다시피 한 로세르가 어떻게 강인한 여성으로 성장하는지(빅토르는 로세르에 대해 어떤 불멸의 재질로 만들어졌을까 찬탄한다), 죽음을 선택하지만 다시 삶의 선택을 받은 빅토르의 어머니 카르메의 자유로운 삶을 참 멋지게 그려냈다. 또한 이름처럼 비극적인 사랑을 하지만 자신의 선택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오펠리어,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나 주인공과 가족들을 도와주는 엘리자베트, 소설의 마지막 부분 자신의 생부를 찾아나선 잉그리드까지 작가는 모든 여성 캐릭터들을 너무도 생동감 있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빅토르가 중심 줄기를 이어가지만, 그를 둘러싼 여성들의 사랑과 강인한 생명력들이 500쪽에 가까운 이 소설을 따뜻하고 풍요로우며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2024년 연초에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하며, 아직 가보지 않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피레네 산맥, 프랑스 아르헬레스수르메르의 바닷가, 파나마 운하, 칠레의 발파라이소, 산티아고가 내 마음 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다. 그리고 칠레는 이제 ‘바다의 긴 꽃잎’으로 선명하게 기억되리라.

 

*인상 깊은 구절

48 "빅토르, 그들은 이상주의자들이다. 이제 그런 건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도 않다. 3월에 우리 위로 떨어진 수많은 폭탄은 미국산이다."~"아무도 우리를 도우러 오지 않을 거다. 아들아, 내가 하는 말 명심해라. 소련까지도 우리를 저버렸다. 이젠 스탈린은 스페인에 관심이 없다. 공화국이 몰락하면 그 탄압은 끔찍할 거다. 프랑코가 대청소를 할 것이다. 즉, 극심한 테러, 엄청난 증오, 가장 잔혹한 복수를 쏟아 낼 거다. 협상도 용서도 없을 거야. 프랑코 군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짓들을 저지를 거다.....“

60 사실 그들 중에서 망명을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프랑스나 다른 어느 곳에서 그들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자기네 집과 동네와 언어와 친척과 친구를 버리고 떠날 수 없었다.

71 사그라지지 않는 열정으로 그 몇 년 동안 공화당원들에게 버팀목이 되어 준 '라 파시오나리아'의 작별 인사말이 가장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그녀는 국제여단원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 위해 나라와 집을 떠나왔지만 오직 스페인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명예만을 원했다면서, 그들을 영웅적이고 이상주의적이고 용감하고 규율이 바른 자유의 십자군이라고 불렀다. 그 십자군 중 구천 명이 스페인 땅에 묻혀 영원히 머물렀다. 그녀는 승리 후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그곳에서 조국과 친구들을 만나게 될 거라고 말하며 작별 인사를 마쳤다.

105-106 빅토르는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자기 품에서 죽어 가는 어린 소년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서른여덟 시간을 흘려보내자 가슴에서 뭔가 폭발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 심장이 고장이 났군." 그 순간 그는 그 말의 깊은 의미를 꺄달았다. 유리 박살 나는 소리가 들리면서 자기 존재의 본질이 빠져나가서, 과거의 기억도 현재의 의식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텅 비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는 구하지 못한 수많은 이들처럼 자신도 피투성이로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인간끼리 싸우는 그 전쟁은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너무나도 추악했다. 계속 죽이고 죽어가느니 차라리 지는 편이 나았다.

155-156 포로들은 미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대책을 마련했다. 그들은 전쟁 중에 그랬던 것처럼 정당별로 나눠서 혁명 집회를 열었다. 노래를 부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신문을-손으로 쓴 한 장짜리 신문으로 한 사람씩 돌려 가며 읽었다.-발행했다. 그리고 머리를 자르고, 서로 이를 잡아 주고, 얼음장 같은 바닷물로 목욕하고 빨래하며 존엄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길에 시적인 이름을 붙여서 수용소를 구분하고, 모래와 진흙 위로 바르셀로나와 람블라스 거리 같은 광장이며 길을 마치 신기루처럼 만들어 냈다. 

170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잖아요...."
"너는 많은 것을 요구하는구나. 애정과 존중만으로 충분하지 않니? 요즘 같은 시절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로세르. 네가 원하지 않는 관계는 절대 강요하지 않을게.“

172 1939년 8월 4일, 보르도. 한여름이었던 그날은 빅토르 달마우와 로세르 브루게라를 비롯해, 그 길쭉한 남미 국가로 떠나는 이천 명 넘는 스펭니 사람들이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이었다. 그들은 바다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산을 꽉 움켜 쥐고 있는 그 나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네루다는 그 나라를 "하얗고 새까만 거품의 허리띠를 두르고, 바다와 포도주와 눈으로 이뤄진 기다린 꽃잎"이라고 정의했다.... <언젠가 칠레>

175 위니펙호는 저물녘에 높은 파고를 헤치며 닻을 올렸다. 갑판에는 조용히 흐느끼는 사람들도 있었고, 가슴에 손을 얹고 「이민자」 노래를 카탈루냐어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정한 카탈루냐여/ 내 마음의 조국/ 너에게서 멀어질 때/ 그리움으로 죽어 가네." 어쩌면 그들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으리라는 걸 예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파블로 네루다는 난민들이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부두에서부터 손수건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에게도 그날은 잊을 수 없는 날이라 몇 년 후 이렇게 저술했다. "원한다면 비평은 내 시를 모두 지우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오늘 기억하고 있는 이 시는 아무도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194 "우리가 스페인에서 겪은 일이 장차 유럽에서 사람들이 겪게 될 일의 전례입니다." 빅토르가 결론지었었다. "독일인들은 우리에게 자기네 무기를 시험하며,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유럽에서는 더 심각할 것입니다.“

221 "당신은 용기가 부족해요. 우리 모두 힘든 시기를 겪었어요. 당신은 불평만 늘어놓느라 우리가 가진 것을 높이 평가하지 못해요. 당신은 고마워 할 줄 몰라요. 바다 건너편에는 끔찍한 전쟁이 있고, 우리는 이곳에서 배부르고 편안하게 지내요. 그리고 당신에게 경고하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오래 살 거예요. 빌어먹을 총통이 아주 건강한 데다가 못된 놈들은 오래 살거든요." 그렇지만 밤에 빅토르가 자다가 지르는 비명을 들으면 로세르는 부드러워졌다. 로세르는 그를 깨우러 갔다가 그의 침대에서 엄마처럼 꼭 끌어안고는, 잘려 나간 사지와 토막 난 몸통, 기관총, 총검, 피 웅덩이, 뼈로 가득한 웅덩이가 잔뜩 나오는 악몽에서 그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256 빅토르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으며 단념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처럼 모든 걸 체념하고 오펠리아의 편지를 받아들였다. 로세르가 처음부터 확실하게 말했듯이, 그 역시 그 사랑이 잘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로세르는 그 사랑이 어쩔 수 없이 시들어 버릴 뿌리 없는 식물이라고, 비밀의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으며 사랑이 커지려면 빛과 공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빅토르는 편지를 두 번 읽고 나서 로세르에게 건네주었다. "늘 그렇듯 당신 말이 옳아." 빅토르가 그녀에게 말했다. 로세르는 한번 쓱 훑어만 보고는 행간을 읽었고, 오펠리아가 살벌할 정도로 차갑게 나오는 게 엄청난 분노를 제대로 숨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341 할머니와 친구처럼 지냈던 손자 마르셀만이 그곳에서 위안을 얻지 못했다. 그는 독주인 피스코 두 단을 마신 후 자리에 앉아서 할머니에게 못다 한 말 때문에, 부끄러워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애정 때문에, 카탈루냐어로 말하지 않은 것 때문에, 할머니가 요리한 맛없는 음식을 놀린 것 때문에, 할머니가 보낸 편지에 일일이 답장하지 않은 것 때문에 울었다. 그는 무례하면서도 거만한 할머니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347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각자 일터를 차분히 지키고, 자신은 자기 자리에서 합법적인 정부를 지키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나는 역사적인 변화에 놓여 있지만, 내 목숨으로 민중의 충성에 보답하겠습니다." 빅토르는 흐르는 눈물로 운전할 수가 없어서, 전투기들이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순간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거의 그와 동사에 첫 폭발음을 들었다. 그는 멀리서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짙은 연기를 보았고, 믿기지는 않지만 대통령궁이 폭격을 받고 있다고 짐작했다.

351 "....그 영광스러운 인물을 또다시 칠레를 배신한 칠레 군인들의 기관총에 너덜너덜하게 벌집이 되어 죽어 갔다."라고 적었다. 시인이 말이 옳았다. 과거에도 군인들이 합법적인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는데도 잘못된 집단 기억이 이전 배신의 역사를 깨끗하게 지워 버린 것이다. 

372 그녀는 당시 망명과 맞섰던 강인함으로 불평 하나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래만을 바라보면서 지금도 망명과 맞서고 있다. 로세르는 어떤 불멸의 재질로 되어 있는 걸까? 어쩌다다 자신은 그토록 오랜 세월 그녀와 함께 사는 크나큰 행운을 누리게 된 걸까? 얼마나 미련했으면 지금 그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지금 그녀를 사랑하듯이, 당연히 그래야만 했는데도 처음부터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374-375 "착각하지 말아요. 특히 시골에는 가난이 넘쳐나요. 모든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잊었어요. 그게 폭력을 유발하고 언젠가 이 나라는 그것을 소홀히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겁니다." 발렌틴 산테스가 로세르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376 우주의 자연법칙은 엔트로피 법칙으로, 모두 무질서하게 파괴되어 흩어지고 사라지는 법이다. 피난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라졌는지 보라. 사람들은 사라지고, 감정은 색이 바래고, 망각은 연무처럼 삶 속으로 스며든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있게 하려면 영웅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로세르는 "그게 난민들이 느끼는 예감이에요."라고 말했다. "그건 사랑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예감이야." 빅토르가 그녀의 말을 고쳐 주었다.

413-414 로세르가 늘 얘기하듯, 두려움은 부끄러움을 몰랐다. 빅토르는 한창 전성기로 경력의 절정에 올라 있었고, 이상하게 자기가 칠레의 변화를 상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둠은 물러가고 자유가 밝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넓은 의미로 그도 찬란한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일에 전념했고, 내향적인데도 살면서 처음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려고 노력했고, 사람들 앞에 나설 기회를 잘 포착했다. ”빅토르, 조심해요. 당신은 승리에 취해 있어요. 삶에는 여러 굴곡이 있다는 거 명심해요.“

461 내가 가장 고마워하는 게 뭔지 아니? 사랑이다. 그게 어느 것보다 내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나는 로세르를 만나 엄청난 행운을 누렸어. 그녀는 언제나 내 삶의 사랑이었지. 그녀 덕분에 마르셀도 있고, 내겐 아버지라는 것 또한 본질적이다. 인간이라는 조건에서 볼 때 최고를 누릴 수 있게 해 줬으니, 마르셀이 없었다면 나는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잉그리드, 나는 너무도 잔인한 것들을 봤다. 나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고 있어. 그리고 나는 네 어머니도 많이 사랑했다.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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