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호실로 가다(도리스 레싱)

 

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책을 읽는 내내 충격과 전율을 느낀 것이 언제였을까? 이 작품을 읽으면서 단편 하나하나 차가운 얼음을 예리하게 갈아 콕콕 찌르는 것처럼 얼얼하고 찌릿했다. 창비의 영국 단편집 가든파티를 읽으면서 지붕 위의 여자속 세 남자의 관음증적인 심리를 건조한 듯 신랄하게 풍자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 속 <<최종 후보 명단에서 하나 빼기>는 마치 <지붕 위의 여자>의 삶 속으로 들어와 그 여성의 일상 속 추근덕 대는 남성들의 찌질한 행동과 심리를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더욱 그 강도를 높여 조롱하고 비판하는 것 같았다. 첫 단편부터 몰아치더니 마지막 <19호실로 가다>의 여자 주인공의 심리는 숨도 못 쉴 만큼 몰입도가 높아서, 마지막 장면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정말 촌스러운 논평이지만, 작가는 정말 천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단편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있는 주인공들의 다층적인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최종 후보 명단에서 하나 빼기> 속 바버라 콜스는 <지붕 위의 여자> 속 태닝을 하는 여성이 직업상 일상 속에서 만나는 전형적인 찌질남들을 어퍼컷으로 날려버린 작품 같고, <내가 마침내 심장을 잃은 사연> 속에 등장하는 여성은 <한 남자와 두 여자> 속 도로시 혹은 스텔라의 모습, 또는 <남자와 남자> 사이의 페기 혹은 모린의 모습, 혹은 <19호실로 가다>의 주인공의 가장 가슴 아픈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것 같았다.

 

<영국 대 영국>은 중하층 노동계급의 남성을 중심으로 기성세대, 중산층, 여성 등 모든 상황에서 분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분열적인 남성들의 모습들이 다른 단편들에 등장하는 남성들에게도 조금씩 배어 있다고 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19호실로 가다>는 책의 제목으로 선정될 될만한 작품으로, 다른 단편들보다 몇 배의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은 이후로 처절하게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 절대적인 존재감을 찾는 수전의 모습은 버지니아 울프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충격적인 메시지를 접한 작품들도 있었지만, 처절한 고통과 아픔이 거대한 파도처럼 느껴지는데 이해는 더디기만 했던 <내가 마침내 심장을 잃은 사연>, <한 남자와 두 여자>에서는 끔찍한 균열을 겪은 주인공들의 하루의 마지막을 무척 아름다운 밤이라고 왜 표현했는지 궁금하기만 하고, <>, <두 도공>은 도무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가늠이 되지도 않았다. 20년 전 마음을 확인하고도 다시 발길을 돌린 두 남녀의 이야기 <20>은 의아할 뿐이었다. (고행 모임에서 이 의문점을 풀어봐야겠다)

 

이렇게 부족하고 더디기만 한 이해력으로 책을 읽어갔지만, 19호실로 가다는 삶 속 어딘가에 강렬하고 선명하게 새겨진 것 같다. 그저 놀라운 작품이다.

 

<최종 후보 명단에서 하나 빼기>

20 그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녀와 둘이 있는 모습을 몇 번 남들에게 노출했다. 문제될 것이 없는 일이었다. 그가 작업상 남녀를 불문하고 유명한 사람들을 접대해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아내에게는 항상 그런 만남을 직접 말해주었다. 이 여자와 잠깐 사귀었을 수는 있지만, 그보다는 그냥 사귀는 척할 때가 더 많다고. 물론 자신을 부러워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기분이 좋아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54 그가 창피를 느끼지 않게 지켜주는 것이 바로 그 증오심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가 그녀 옆에 누웠다. 그러면서 그는 당신은 지루한 남자라고 열심히 표현하고 있는 여자를 자신이 강간하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그의 신체 일부가 완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슬픔에 젖어 그를 질책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56-57 “그건 내가 너한테 좋은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야……. 어쨌든 여자 천 명 중 한 명을 내 품에 안은 거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천 명?”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천 명의 특별한 여자.”
영국에서요 아니면 전 세계에서요? 선택기준은 뭐죠? 머리? 미모?”
뭐든 뛰어난 점이 있기만 하면 돼.” 그는 그녀에게 찬사를 바쳤다.
.” 한참 만에 그녀가 말했다. “내가 올라 있다는 후모병단이 정말로 존재해야 할 텐데요. 적어도 당신이 무례한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자면 안 된다고 중얼거렸지만, 서서히 눈을 뜨고 보니 아침이었다.

 

<옥상 위의 여자>

69 그 여자는 계속 담요 위에 누워 몸을 이리저리 뒤집었다. 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 그녀는 그들을 무시했다.

70 스탠리는 정말로 화가 나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톰은 계속 그를 보면서 왜 저 여자를 저렇게 미워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내가 마침내 심장을 잃은 사연>

88 내 가슴의 이것이 돌덩이라면, 돌덩이라면,
그것을 봅아내고 자유로워질 텐데…….

 

<한 남자와 두 여자>

108 스텔라는 한동안 브래드퍼드 부부와 자신을 이어주는 유대감이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시인, 극작가, 소설가도 포함)였다. 그들은 상업성을 냉정하게 경멸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모임에서 자기들끼리 점심식사를 하고 자기들만의 살롱에서 자기들끼리 파벌을 짓는 구세대와는 아주 달랐다.(그들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118 도로시가 새어 들어온 햇빛의 빛기둥 사이를 통과하며 다가오다가 멈춰 서서 말했다. “스텔라, 와주서 기뻐.” 그러고는 다시 몇걸을 떨어진 곳까지 다가와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이 보기 좋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두 문장 모두 왠지 무겁고 과장된 느낌이 났다.

137 이렇게 예쁘고 귀한 것을 갖고 있는 이 여자가 무슨 권리로 남편과 친구를 괴롭힌 건가? 무슨 권리로 남편과 친구의 호의를 믿고 그렇게 굴었나?

138 두 사람의 얼굴은 1피트(30센티미터) 거리로 떨어져 있었다. 두 사람의 눈에서 적의가 번들거렸다. 만약 스텔라가 그 무기력한 아기의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지금쯤 잭과 부둥켜안고 있었을 것이다. 두 대의 발전기처럼 애정과 욕망을 뿜어내고 있었겠지. 그녀는 메마른 분노로 부들부들 떨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다시 밖으로 나온 그는 그녀의 몸에 손이 닿지 않게 겉옷을 걸쳐주면서 말했다. “서둘러,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 그는 앞장서서 자동차로 향했다. 그녀는 거친 잔디밭 위를 얌전히 따라갔다. 정말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영국 대 영국>

158 반면 손턴 씨는 현관 계단 앞에 서서 마을을 바라보며 자주심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이 광산촌이 옛날에 어땠는지 모르지? 상상도 안 갈거다. 완전히 빈민가였다. 하지만 우리가 그걸 싹 바꿔놨지……. ~ 이 모든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 우리 때는…….”
그래서 찰리는 집에 올 때 이 마을에 대한 신랄할 비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게 주의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자신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159 집안의 여윳돈은 모두 찰리에게 들어갔다. 그가 옥스퍼드에서 공부하는 데 1년에 200파운드가 추가로 들었다.

166 두세 번씩 돈커스터에 와서 과자 포장하는 일을 하잖아. 그런데 따지고 보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어. 버스비를 내야 하니까. 그래서 어머니한테 그런 얘기를 했더니 어머니는 나도 밖에 나가서 바람을 쐬고 싶어서 그래라고 하는 거야. 바람을 쐬다니! 망할 공장에서 과자 포장하는 일이나 하면서. 하루 저녁 시내에 나가서 좀 즐겁게 놀아도 되잖아. ~ 도무지 말이 안 돼. 여자들도 사람이야, 안그래?

169 노동계층과 중하층 가정 출신으로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이 특히 취약하다. 그들에게 학위는 몹시 중요하다. 또한 그들은 낯선 중산층 관습에 적응하느라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들은 기준의 충돌과 문화적 충돌의 희생자이며, 자신의 출신 계급과 새로운 환경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남자와 남자 사이>

229 우리가 사귈 때 결혼증명서를 얼마나 놀림거리로 삼았는데요. 하지만 중요한 건, 결혼한 상대에게서 돈을 받을 때는, 창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 하지만 나는 항상 비참했어요. 그래도 잭과 내가 결혼했다면, 이 망할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로 내가 망할 창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을 거예요. 

234 불공평해, 불공평해……. 남자들은 다 똑같아요. 내가 무슨 위대한 화가라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뭔가 나름대로 성취할 수는 있었을 텐데. 나만의 것을……. 하지만 남자들은 하나같이 놀리기만 하거나, 나한테 아주 선심을 쓰는 것처럼 굴었어요…… 하나같이 전부, 물론 나는 항상 내 뜻을 꺾었죠. 왜냐하면 나한테 더 중요한 것이…….
반쯤 잠에 빠져 긴 의자에 늘어져 있던 페기가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그만해요, 모린, 그런 게 무슨 소용이에요?”
사실을 말하는 거예요. 나는 20년 동안 하루에 18시간씩 남자들의 포부를 지지해 주면서 살았다고요. 내말이 맞지 않아요?”
맞아요. 하지만 그만해요. 우리가 그런 인생을 선택한 거니까.”

 

<19호실로 가다>

277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롤링스 부부의 결혼 생활은 지성에 발목을 붙잡혔다.

284 이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오래전 두 사람은 이런 농담을 나눴다. “내가 당신한테 부정을 저지르는 건 당연한 일이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평생 충실할 수는 없어.”(‘충실하다는 단어도 그렇다. 모두 어리석은 단어들이다. 야만적인 구세계에 속한 단어들.) 하지만 그 일로 두 사람은 모두 쉽게 짜증을 내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성격이 나빠졌다. 왠지 그 일을 완전히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287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고, 탓할 사람도 없고, 내 잘못이라고 나설 하람도 없었고……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다만 매슈가 원하는 만큼 진정한 기쁨을 느끼지 못했을 뿐. 수전이 위험할 정도로 공허할 때가 늘어났을 뿐. (그녀가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대개 정원에 있을 때였다. 그래서 아이들이나 매슈가 함께 있을 때가 아니면, 정원을 피하게 됐다.) ‘부정이라든가 ‘용서’같은 극적인 단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지성이 그런 단어들을 금지했다. 지성은 싸움, 삐치기, 분노, 속으로 침잠한 침묵, 비난, 눈물도 금지했다. 특히 눈물을 금지했다.

290 “이건 모두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야. 처음에 나는 어른이 된 뒤 12년 동안 일을 하면서 나만의 인생을 살았어. 그리고 결혼했지. 처음 임신한 순간부터 나는, 말하자면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겼어. 아이들에게. 그 후 12년 동안 나는 단 한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어. 나만의 시간이 없었어. 그러니까 이제 다시 나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해. 그뿐이야.”

295 그녀는 (학기 중의 평일에) 매일 일곱 시간씩 주어지는 자유가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에 휩싸였다. 수전은 시간의 압박으로부터, 잊지 말고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단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했다.

309 시골의 거친 풍경 속을 돌아다니는 수전을 전화기가 목줄처럼 붙들고 있었다. 그녀가 걸어야 하는 전화, 기다려야 하는 전화가 그녀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녀의 부자유가 산에도 족쇄를 채운 것 같았다.

318 이방에서 수전이 뭘 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충분히 쉬고 나면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양팔을 쭉 뻗고 미소를 지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익명의 존재가 된 이 순간이 귀중했다. 여기서 그녀는 네 아이의 어머니, 매슈의 아내, 파크스 부인과 소피 트라우브의 고용주인 수전 롤링스가 아니었다. 친구, 교사, 상인 등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수전 올링스가 아니었다. ~ 그래, 난 지즘 여기에 있어. 만약 다시는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난 여기에 있을 거야……. 정말 이상하지! 그녀는 창턱에 몸을 기대고 거리를 내려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느꼈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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