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그린 사람(은유)

 

(10) 좋은 이야기는 존재의 숨통을 틔워준다. 내가 보고 듣고 겪는 이야기가 나의 세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제목처럼 세상 곳곳에서 희망을 만들어 가시는 18분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분 한분의 삶이 세상의 빛이 되는 분들이라 사실 읽으면서 부담을 많이 느꼈다.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으니 보고 들은 것의 조금이라도 관심 갖고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조금씩 늘려 가는 것도 나름의 실천방법이라 변명하며 읽었다.

내용도 생각할 거리가 많지만, 중학교 1학년 국어 '면담' 단원과 연결지어 수업할 때 생각할 거리도 몇 가지 있었다. 학교 선생님을 면담하며 좀더 안전한 환경 속에서 면담하며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맺는 시작으로 활용했는데, 아이들이 관심 갖는 분야의 사람에 대해 자료를 조사하고, 직접 질문을 만들어 면담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머리말처럼 존재의 숨통을 틔워주는 그런 시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5년 전에 중3학년과 프로젝트로 진로 및 직업인을 면담하여 발표했던 일이 떠올랐다. 시간이 좀더 필요한 과제이겠다 싶었다. 그런 수업을 설계할 때 이 책이 큰 도움이 되겠다. 

은유 작가는 인터뷰이를 만나기 전 관련 자료를 수집하면서 인터뷰의 방향을 정하고, 질문을 선정한다. 그리고 인터뷰 내용을 충분히 소화해 재생산한다. 인터뷰 내용을 지상 중계하는 게 아니라서 인터뷰이를 압축적으로 만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열여덟 분. 어느 한 분도 지나칠 수 없는 분들이지만, 내 입장에서 인상적인 분들을 메모하며 책을 소개한다.

3. 원도 과학수사대 경찰

(53) "경찰은 기억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 모습을 잊지 않는 것. 여성 자살의 80퍼센트는 사회적 타살이에요. 피해가 있으면 남자들은 남을 죽이는데 여자는 자기를 죽이는 경향이 있어요. 자기한테 화살을 돌려요. 여자가 죽었는데 남편한테 맞아 죽은 거예요. 시체가 다 멍인데 이 여자가 알코올중독 환자라는 이유로 수사가 잘 안 이뤄지는 거예요. 유가족이 없으면 이의 제기하는 사람이 없죠. 현장 갔다 오면 눈물이 난다니까요. 글쓰기는 저 나름대로 풀어내는 방법이기도 해요. 사람들은 결과만 보니까.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 기록하고 싶은 거죠."

*지방 출신, 여성, 장애인 가족으로, 남자 중심의 경찰 조직에서, 피해자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갖는 아웃사이더일 수 있지만 스트레스를 글로 풀어가고, 사명감으로 감내하기보다 직업인으로서 근무조건 향상과 자기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공유하고 풀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5. 임현주 아나운서

(85) "그날의 작은 시도가 이제 저를 자유롭게 만들었어요. 몸도 생각도.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걸까?'라는 질문이 저의 모든 행동에 따라붙어요.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없는 것들이 많더라고요. 고정관념을 스스로 많이 안 가지려고 노력을 해요.

*안경 쓴 앵커로 유명한 임현주 아나운서. 지상파 아나운서가 됐어도, 위치상 수동적으로 전전긍긍하는 삶에서 자존감이 떨어졌다고 한다. '대체되지 않는 나'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8. 김중미 작가

(137) 가난한 사람은 게으를 거야. 아무런 노력도 안 하고 평생 저렇게 살아온 것 같죠. 무기력해 보이니까. 근데 그렇지 않거든요. 매 순간 치열했지만 계속 좌절해온 사람들이잖아요? 사실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고요. 실패한 경험들도 많고, 경제적인 상황들 때문에 심리적으로 상처를 받은 경우도 많은데, 그냥 한 개인의 능력으로 판가름 해버리는 거잖아요. (중략) 상처 입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날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공이다. 

*확실히 소설과 현실에는 차이가 있다. 작가가 처한 현실에 비해 소설은 더 따뜻했으니까.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이제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모두 깜언"이나 "어느날, 고양이가 내게 왔다"는 문제 상황이 그래도 어느정도 해결되 가니까. '곁'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남는다. 사실 부자를 꿈꾸지만 남의 것을 모아야 부자가 된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 열패감이 아닌,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9. 이영문 국립정신건강센터장

(141) "저희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는 가장 적합한 부서가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죠. 미국에는 소수자를 담당하는 청급의 부서가 있어요. 영국에서도 '외로움 장관'이 있죠. 겸임제로 국민들의 외로움을 담당해요. 아랍에미리트에는 '행복부 장관'이 있어요. 우리나라도 이런 정책이 필요하다고 봐요. 우리 같은 국가 센터에서는 그분들을 돕기 위한 임상 프로그램을 진행해야죠."

*"새로운 가난이 온다"의 저자 김만권 교수님의 강의에서 들었던 이야기이다. 자살률이 높고, 고립돼 가는 20대가 늘어나는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부서다. 이외에도 이영문 센터장 님의 이야기에는 마음의 부담을 털어내 주는 이야기가 많았다. 혁신학교 운동을 하면서 나보다 조직을 먼저 생각할 때가 많다. 그 스트레스가 나는 내 머리카락을 앗아갔다고 생각한다. 나 없이도 학교는 굴러간다. “네가 마음대로 해도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그건 너의 걱정일 뿐이다.(148)”

13.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211) (김주익 한진중공업 지회장인 2003년 크레인 투쟁 후 자진했을 때) 그해 노무현 대통령은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발언했다. “그 말은 참 아파도, 지금도.(침묵) 노동자들의 삶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대통령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 말은 꼭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 후로 노동자들의 고립은 점점 심해지고. 어쨌든 그 시절에 같이 투쟁했던 분들이 지금 국회의원이 되시고, 청와대 수석들이 되시고, 옆에서 같이 활동하셨던 분은 대통령이 되시고, 노동자들은 그냥 다 비정규직이 됐어요.”

*돌아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진정한 보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인과 국민을 우선에 두는. 윤석열을 거치며, 다음에 집권하는 진보 대통령은 진보 진영의 바람을 다 했으면 좋겠다. 배려하며 해도 어차피 세상은 요지경이 아닌 '요요'이니까. 헤겔의 역사의 진보가 지금 내 눈에는 맞는 것 같지는 않지만 좀더 긴 안목으로 보면 그럴 거라 믿는다.

14. 수신지. 웹툰 작가

(226) “<며느라기>에서 무구영은 시할아버지 제사 준비를 하는 아내에게 ”내가 빨리 가서 도와줄게“라고 한다. 이에 민사린은 ”구영아, 나는 할아버지 얼굴 본 적도 없거든. 내가 너를 돕는 거라고 생각되지 않니?라고 말한다. 무구영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위근우 칼럼니스트는 ‘무골호인 같은 태도 안의 폭력성’을 탁월하게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수신지의 작품에는 교양과 상식이 있어 보이는 남자들이 가부장제의 불합리한 관행의 공모자이고 수혜자라는 게 잘 드러난다.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며느라기>라는 드라마의 쇼츠를 몇 번 보았다. 

15.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

(243) 활동가가 왜 좋은 직업이냐고 묻는 이에게 그는 뭐라고 답할까.
"우리 힘으로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게 주는 엄청난 건강함이 있어요.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힘이 돼요. 제가 어릴 때부터 잘 안 아팠어요. 체력이라는 기본 요소가 있어서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죠. 그래서 저는 상담소에 있지 않았다면, '능력 담론' 있잖아요, 뭐든지 사회구조를 보는 게 아니라 '누구나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란 생각을 믿으며 살았을 것 같아요. 나 개인이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남들한테 배우는 게 좋아요. 단체에서 만든 티셔츠를 싫어했는데 이젠 좋아지더라고요.(웃음) 새록새록 그들이 보냈던 시간을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요."

*모임의 힘이 잘 드러난다. '활동가'란 뭔가를 만들어 내는 조직. 개인의 능력치가 아닌. 또 성폭력 피해자를 주체로 만드는 것. 학교의 모임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을 주체로 내세우는.. 하지만 “한국은 '유가족이 할 일이 너무 많은 나라'라는 슬픈 말이 있다(247).”은 안타깝다.

16. 박선민 국회의원 보조관

(261) 이익단체들은 국회를 잘 활용하는데, 사회적 약자분들은 국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가질 수조차 없으니까, 그걸 우리 정치가 해야죠.

*정치에 무관심한 결과를 지금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투표를 안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잘못 본 죄, 언론을 잘못 본 죄로.

17. 김도현 고 김태규의 누나

(264) 슬프게도 이미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나서서, 일하다가 죽지 않는 법을 만들자고 싸우고 있다. 싸워서 법이 제정돼도 떠나보낸 가족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모르지 않는데도 싸운다. 아니 가족을 잃어서 싸울 수 있는 거다.

*한 해에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추락사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리고 하나같이 개인 탓으로 돌린다는 것. 유가족들 덕분에 거대한 바위에 조금씩 금이 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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