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이희영)

 

2학기에 학생 여럿이 이 책으로 서평을 썼다. "페인트", "나나", "챌린지 블루"를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눈에 담아 두었는데, 방학을 맞아 찾은 담양공공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얼른 찜했다.

 

표지를 보아서는 남녀 고등학생들에 대한 이야기인 듯싶은데,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란 제목과 소제목을 살펴봐도 내용이 잘 짐작되지 않았다. 다만 소제목이 모두 3음절인데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이야기가 시작되자 이야기에 금방 몰입하게 되었다. 선우-혁의 형은 왜 죽었을까, 메타버스 '가우디'에 형의 집을 오랫동안 관리하고 있는 '곰솔'은 누구일까, 챕터의 끝이나 이야기 중간에 등장하는 '편지'는 누가 누구에게 보낸 것일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예측한 게 맞기도 하고 빗나가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참견하게 되었다^^

 

다 읽고 나니, 표지 그림도, 제목과 소제목의 의미도 잘 느껴진다.

이야기가 속담으로 끝나니 나도 속담으로 감상을 시작해 볼까 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은 사람 사이에 쓰면 안 될 말이다. 또래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 사춘기, 특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학교에서, 눈에 보이는 한 면만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누군가에 대한 평판을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속담대로 살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는 따돌림을 당하거나 이해받지 못한 채 아픈 상처를 평생 간직하게 된다. 이야기에서도 친구들과 두루두루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도윤이에게 닥친 상황도 그렇고, 매정하고 차갑다는 평판을 받는 해송이의 처지도 그런 상황을 잘 나타낸다.

 

그래서 사는 게 참 어렵다.

태생적으로 사람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사람 속에서 살아가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할지 작가의 조언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눈부신 안부"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면 아버지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도 읽혔고, 겉모습으로 짐작할 수 없는 선자 이모의 일기를 통해 타인에 대한 사랑과 열정, 파독간호사의 다양한 삶을 바라보며 어떤 한 사람의 안다는 것의 의미를 잘 느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해마다 새로운 사람들(선생님과 학생과 학부모)을 만난다. 누군가의 한면만 특히 좋지 않아 보이는 한 면에만 집중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누군가에 대한 평판에 휩쓸리지 않아야겠고. 나 역시 살아가면서 '이불킥'을 할만한 상황이 계속 나타나더라도 내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나를 충전할 기회를 찾고 만들어야겠다. 

지금 나에게 '귤'은 무엇일까.

 

<밑줄 긋기>

(25) 형 사진을 향해 '너 어릴 때구나?' 도운은 의심 없이 물었다. 하지만 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형제가 닮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니까. 그런데 처음 고등학교 교복을 입던 날,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거울 너머에는 동영상에서 보던 형이 서 있었다. 마치 가상 세계에서 형의 아바타와 마주한 기분이었다. 엄마가 입학식 날 눈물을 흘린 이유도, 아빠가 선웃음을 지었던 까닭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죽은 형의 모습이 되어 가고 있었다.

✍ 너무 어렸을 때 형을 잃어 형에 대한 기억이 없던 '선우 혁'은 형이 다녔던 학교에 다니고 같은 교복을 입으면서 서로 쌍둥이처럼 닮았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형이 궁금하고 형을 알기 위해 노력한다. 비록 이런 선택에 대해 크게 후회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런 게 운명인가. 

 

(95) "여기 나한테 되게 소중한 곳이다."
도운이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한숨을 내쉬웠다.
"그래 봤자 가상 세계인 알고, 터치 번이면 쉽게 사라지는 허상이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나에게는 정말 특별한 공간이야."
"……."
"때로는 현실보다 중요해. 아니, 현실이 아니라서 소중할 수도 있겠다."

✍ 이야기에서 메타버스는 현실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방의 공간, 충전의 공간이다. 현실 세계가 내 뜻대로 작동하는 곳이 아니라면 메타버스는 내가 만든 세상이기에 나에게 더 소중할 수 있다는 말에 설득력이 느껴진다. 이 책에서 메타버스에 접속하는 장면은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을 떠올리게 한다. 메타버스가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

 

(108) 학교는 용광로와 비슷해. 최신 유행과 정보가 빠르게 녹아들지. 그렇게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절대 나쁘다고는 생각 안 해. 오래전에는 시류에 올라타지 않은, 또는 못하는 아이들을 살짝 배척하는 분위기였잖아.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용광로는 여전한데 그 안에 정말 다양한 것들이 들어가거든.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틀을 가지고 뜨거운 쇳물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담아내지.
이렇듯 다양성이 존중되는 학교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어. 바로 소문이 퍼지는 속도와, 그에 비례해 점점 더 과장되는 말들. 이건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

✍ 학교는 메타버스 덕분에 개인의 다양성이 발현되고 존중하는 문화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타인에 대한 폭력적인 문화 역시 계속될 수도 있겠다. 사회로서 학교의 한계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학교이기에 해결책이 필요하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경쟁적인 문화가 진정되어야 하고, 학교가 좋은 공동체를 경험하고 체득하는 곳이 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 규모부터 적당히.

 

(121) "너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
내가 말했지. 너도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어.
"나도 나에게 이런 면이 있는 몰랐어."
누군가를 마음에 담아 두는 일은, 타인이 아닌 낯선 스스로를 만나는 시간인 같아. 사실을 너를 통해 배웠어.

✍ 이런 게 학교의 역할인 듯싶다. 나와 다른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 서로를 존중하는 한편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187)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 사람들은 모두 애쓰면서 사는 것 같아.'
그 말이 정답이다. 다들 애쓰면서 산다. 슬픔과 아픔을 감추고, 괜찮은 척, 밝은 척하며 사는 게 인간이다. 내가 처음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날, 활짝 웃는 얼굴에 눈물이 차올랐던 엄마처럼. 아들에게까지 아을 숨기려 어색하게 웃던 아빠처럼 말이다. (중략) 외향적이든 내향적이든, 대범하든 그렇지 못하든,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 과정에서 무엇이 좋고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세상에는 수많은 성격과 가치관이 존재하니까. 딱 하나의 해결책만 있는 건 아니다. 도운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 갈 것이다.

✍ 내가 '청소년 소설'을 읽고 아이들에게 소개하는 이유를 잘 이야기해 주고 있다. 모두 애쓰면서 살고 있다. 비슷한 문제 상황을 겪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통해 해결책을 살펴보자고.

 

(243) 부조는 그 나름의 분명한 아름다움이 있다. 부조 작품을 보며 누구도 조각된 면 너머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타인이 보여 주는 모습을 존중하되, 그것이 전부라 단정 짓지 않으면 된다. 좋은 인상을 주었든, 나쁜 이미지로 남든 간에 말이다. 어른들의 말처럼 열 길 물속보다 깊은 게 인간이니까.

✍  '열 길 물속보다 깊은 게 사람'이라는 말을 올해 새로 만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할 때 꼭 마음에 두어야겠다.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