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안부(백수린)

 

독서 모임에서 2023년에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이다. 학년말이라 업무가 쌓여 있었는데도 제쳐 두고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다들 재미있게 읽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바빠서 정리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방학하고 작년에 읽었던 책 중 소감을 정리하지 못한 책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다시 읽어도 재미있다. 오히려 모임을 앞두고 읽었을 때보다 마음의 여유가 있어 이야기의 복선들을 충분히 생각해 보며 읽을 수 있었다.

‘해미’는 좋아하고 따르던 언니를 갑작스러운 사고로 잃고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하지만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고라 주위 사람들의 이목을 견디기 힘들었고 아빠는 직장을 부산으로 옮기고, 엄마를 비롯한 가족은 유학 겸 파독간호사 이모가 있는 독일로 떠난다. 엄마 역시 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엄마의 입장을 헤아려 독일 이민에 동의했지만 해미는 독일어가 서툴어 적응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모의 도움으로 파독간호사 자녀들과 친해지고 그들과 파독간호사였던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슬픔을 이겨내고 희망을 꿈꾼다. 하지만 IMF 때문에 갑자기 귀국하게 된다.
귀국해서도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 프로젝트는 진행되지만 사람을 찾는 일은 쉽지 않고, 독일과 부산은 너무 멀었으며, 선자 이모의 삶도 길지 않았다. 친구의 간절함을 모른 척할 수 없었던 해미는 선의로 했던 일 때문에 오히려 독일 친구들과 더 멀어진다. 
해미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더 소극적으로 변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지만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기자로서 전달하고자 했던 것들도 자본주의적 시스템 속에서 환멸을 느끼며 그만둔다. 우연히 대학 때 친구 우재를 만나고 나이 마흔에 다시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를 다시 시작한다. 그런데 그 과정은 선자 이모의 삶을 이해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찾은 선자 이모의 첫사랑에는 큰 반전이 있다. 


해미의 삶에는  언니와의 사별이 큰 영향을 끼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언니의 죽음은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은지, 언니보다 내가 죽었어야 가족들이 더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런데 사별은 준비한다고 해서 충격이 덜한 것도 아니다. 뇌종양으로 스러져 가는 선자 이모의 아들이자 친구인 한수를 보면 그렇다.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몇 년 전에 읽었던 “행복을 배우는 덴마크 학교 이야기(제시카 조엘 알렉산더)”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덴마크 교육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명의 한계를 통해 오히려 더 풍성한 삶을 배우는 교육을. (링크하려고 보니 메모한 게 없다 조만간..)

 

또한 ‘파독간호사’의 삶을 애국과 희생으로만 한정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애국과 가족을 위한 희생뿐이었다면 3년 뒤 귀국해도 되지만 독일에 남는 삶을 선택했다는 것에서 파독간호사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선자 이모의 일기장은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을 통해 아버지의 진정한 모습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선자 이모’의 삶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찬란하게 살았던 선자 이모의 삶을 통해 해미 역시 자신의 한 번뿐인 삶을 찬란하게 펼쳐 나가기 시작한다. 한편 개개인의 특성을 포함된 집단의 이미지로 환원하는 문화에 대해서도 이제는 성찰이 필요하다. 


해미의 현재와 과거, 거기에 선자 이모의 과거까지 입체적으로 그려지며 "눈부신 안부"는 청소년기, 성인기 할 것 없이 삶은 계속되고 사람의 마음은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감(109)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다.

2024년 새해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한 번뿐인 인생 모두들 원하는 대로 찬란하게 살아가기를.. 

<인상 깊은 구절>

(67) “만약에 네가 무인도에 혼자 갇혀 있다고 생각해봐. 밤이 되었는데 저 멀리 수평선 가까이에서 불빛이 보이고. 그러면 너는 너무 멀어서 네가 보이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무언가를 하지 않을까? 단 하나밖에 없는 성냥이라도 그어서 신호를 보내려고 하겠지. 간절하다는 건 그런 거니까.”

✍ 한수와 레나의 선자 이모 첫사랑 찾기 프로젝트에 동참하게 된 이유. 해미 역시 간절함의 의미를 잘 알고 있기에 동참한다. 나 역시 간절함으로 새해의 시작은 백아산에서 시작했다. 

(100) 숨기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게 사랑일 테니까. 봄볕이 나뭇가지에 하는 일이 그러하듯 거부하려 해도 저절로 꽃망울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무엇이든 움켜쥐고 흔드는 바람처럼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째 떨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사랑’의 절대적인 힘과 의미가 잘 전달된다.

(118) "너희들은 결국 다 나한테 뻑갈 거야!"
동생 앞에서는 잘난 척했지만 정작 나는 독일에서의 마법이 풀리기라도 한 듯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다. 사춘기는 무리의 성격과 다른 것을 배척하는 시기였고, 나의 서울 말투라든가 딱딱한 독일어 억양이 묻어나는 영어 발음 같은 건 쉽게 놀림거리가 됐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맞서 싸우는 대신 눈을 내리까는 쪽을 택했는데 그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해서라기보다는 내가 그곳을 곧 벗어나리란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20)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각자의 불안을 견디는 일이었다. 우리를 조급하게 어른으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결핍을 견디는.

✍‘사춘기’ 우리 아이들의 상황이 잘 드러났다. 아이들이 왜 또래에 집착하는지 잘 공감이 된다.

(161)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선자 이모의 모든 일기장 첫 페이지에 적혀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간절함이 느껴진다.

(202) 나는 우리가 한국서 배워간 미국식 선전 기술로 독일에서 간호사들에 대한 인식을 진짜 많이 개선시켰는데 산업역군이니 뭐니 하면서 고생고생한 것처럼만 사람들이 말하면 그게 그렇게 싫던데.

✍파독간호사의 시선에서.

(303) 물론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늘 동경했던 시인이 되지도 못했고, 뼈아픈 시행착오를 수도 없이 겪었어.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며 더 이상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랐으니까.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의의 것이니까.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누구나 거룩하고 눈부신 별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으니까.

✍찬란한 삶, 찬란한 삶을 사람들에게 건네는 ‘눈부신 안부'

 

(308) 황량한 바닷가에 묵묵히 서 있는 야자수들을 보면서, 이국적인 풍경을 위해 뿌리째 뽑아 기후와 토양도 맞지 않는 곳에 심었다니 너무하네, 정말 너무해, 슬프고 사나워졌던 그 밤의 마음은 지금도 선명히 생각난다. 하지만 이제 그보다 더 간직하고 싶은 건 고운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으며 우재가 한 말이다.
"그런 야자수들이 살아남아 이젠 제주의 일부가 되었으니, 정말 아름다운 일이지?"

✍삶의 시공간에서 뿌리 박고 살아가는 사람 모두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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