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 (폴란드 문학)

 

하고 많은 유럽 나라들 중에서 ‘폴란드’라니! 축산업이 발달해서 우리가 먹는 돼지고기 중 수입산의 대부분이 폴란드인 것 정도만 알고 있는 정도의 나라인데... 어쨌든 폴란드가 과연 러시아, 프랑스, 영국처럼 우리가 읽어볼 만한 작품들이 많은 나라인가? 혹은 스페인어처럼 언어와 문화가 방대한 영향을 끼치는 나라도 아닌데, ‘폴란드’라니! 심지어 400쪽이 넘는 분량이라니!
그런데 첫 작품 <등대지기>를 읽고 단번에 생각이 바뀌었다. 대단한 문학적 성취를 느껴서라기 보다는(솔직히 그걸 가늠할 수 있는 안목도 없지만), 폴란드라는 나라가 한국과 비슷한 공감대와 정서를 지니고 있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느꼈던 그 간질간질한 감동과 비슷한? 스카빈스키에 반영된 폴란드 사람들의 열정이 폴란드 문학에 무지했던 나를 단번에 깨어나게 했던 것 같다.
<등대지기>로 폴란드 문학에 대한 마음의 자세가 달라졌다면, <파문은 되돌아온다>(방탕한 자본가와 노동계급의 대립), <모직조끼>(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닮음)에서는 단숨에 몰입되는 경험에 빠졌다. 그리고 <우리들의 조랑말>에서는 개인적으로 가난했던 유년시절에 대한 낯설지만 익숙한 장면들에 마음이 깊숙하게 스며들었다. <빌코의 아가씨들>이나 <자작나무숲>은 정말 지루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게 만드는 마법에 빠진 것 같았다. <빌코의 아가씨들>에서 만난 빅토르처럼 뭔가 중요한 것들을 잊고 살았던 내 모습도 떠오르고, <자작나무숲>은 음울하고 습기 찬 배경에서 이어지는 형제의 이야기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는 읽은 후 다음 작품을 읽기 힘들 정도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이 충격적이고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후 <구름 속의 첫걸음> 외 단편 두 편도 폴란드 문학의 현대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어쨌든 전혀 관심이 없었던 폴란드라는 나라에 대해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든, 새롭고 행복한 독서였다.

-인상 깊은 구절-

등대지기(헨릭 사엔키에비치)

(18) 그는 단 한번도 살려달라고 발버둥치거나,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며 투항한 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불운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부지런한 개미처럼 꾸준히 산을 기어올랐다. 백번째 오르다 백번째 마저 실패하면, 다시 묵묵히 백한번째 여정을 시작하곤 했다. 이처럼 스카빈스키에게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면이 있었다. 가난과 역경이라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는 뜨거운 불길에 수없이 달궈지고 연마된 노인의 정신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순수했다. ~ 스카빈스키의 불가사의한 점은 그처럼 많은 좌절을 겪으면서도 항상 자신감에 넘치고, 모든 일이 잘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31) 노인은 사랑하는, 하지만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조국에게 눈물로써 용서를 빌었다. 자신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늙어버린 것에 대해, 이 외로운 바위섬에 너무나도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대해, 그리고 조국에 대한 향수마저 지워버리려 했던 데 대해, 그런데 잃어버린 줄 알았던 모국어가 지금 ‘기적처럼’ 노인의 품으로 돌아왔다. 
~ 태양은 빠나마의 원시림 뒤로 서서히 고개를 떨어뜨리며, 수평선 너머 또다른 대양 저편으로 가라앉고 있었지만 대서양에는 아직도 석양의 잔영이 남아 있어서 글을 읽기에는 충분했다. 노인은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내려갔다.

향수에 젖은 나의 영혼을 데려가주소,
그 언덕의 숲, 푸른 니에멘 강가의
넓디넓은 녹색의 들판으로……


파문은 되돌아온다(볼레스와프 프루스)

(111) 목사는 연못에다 또다시 병마개를 집어던지고는 직물업자에게 그 마개를 가리켜 보였다.
“고틀리프, 보게나! 열 번째 파문이 가장자리로 퍼져나갔다가 되돌아오는 게 보이나? 파문은 언젠가는 되돌아오는 법일세. 거기, 처음 생겨난 곳으로.”
목사의 단순명료한 비유는 늙은 공장주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머뭇거렸다. 그의 내부에서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솟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미래에 벌어질 일을 예감하기에는 판단력이 부족했다.

(130) 아들에 대한 노인의 사랑은 갈수록 커져갔다. 지금은 집밖에서 망나니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걸 눈감아주고 있지만, 아들을 사랑하기에 언제까지나 곁에 붙잡아둘 수는 없다는 사실을 노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직조끼(볼레스와프 프루스)

(166) 낡은 조끼를 유심히 살펴보니, 조끼의 버클과 허리끈에는 두 사람이 손을 댄 흔적이 보인다. 남편은 부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매일같이 버클을 잡아당겨 열심히 끈을 조였고, 부인 또한 남편을 안심시키기 위해 매일 밤, 남편이 잠든 사이에 몰래 끈이 길이를 줄였던 것이다.

 


우리들의 조랑말(마리아 코노프니츠카)

(174) 유지엑의 말은 충격이었다. 결국 바닥에서 자는 것은 우리 삼형제만이 할 수 있는, 기발한 일이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181) 나는 황새가 공짜로 우리집에 데려다준 선물이지만, 이 절구는 같은 시기에 비싼 값을 치르고 사왔다는 이야기였다. 

(197-198) 우리는 건초더미에 누워 낯익은 어머니의 수건에 싸인 아코디언을 보았다. 펠렉이 내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비첵!”
“왜?”
“그거 알아? 연주하면서 아버지가 우셨어……”
“웃기지 마!”
“맹세코 사실이야!”
펠렉은 답답하다는 듯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치며 말했다. 실은 나도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216) 인간적인 도리에 어긋나는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우리는 어머니의 죽음을 별로 실감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미 반년 이상 병으로 누워 있었고, 특히 마지막 몇주 동안은 꼭 죽어버린 지금의 모습처럼 침대 위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222) 우리는 조랑말을 마치 결혼식장의 신부처럼 멋지게 장식해 주었다. 꽃이 주렁주렁 매달린 신선한 아카시아 가지를 손에 잡히는 대로 듬뿍 꺾어다가 조랑말의 귀와 고삐, 굴레에다 꽂았다. ~또다시 위풍당당한 개선행진이 시작되었다.

 

빌코의 아가씨들(야로스와프 이바시키에비츠)

(234) 너무나도 익숙한 길을 따라 너무나도 잘 아는 그곳을 향해서 걸어가는 지금 이순간, 햇살은 ‘늘 그렇듯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고, 부드러운 풀밭을 지나 들판에서 돌아오는 소떼 뒤로 개들이 ‘늘 그렇듯이’ 컹컹대며 짖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는 역시 과거이자, 역시 여름철에 보았던 또다른 장면이 어른거렸다. 불에 탄 들판, 뜨거운 먼지, 길가의 배나무 아래 아무렇게나 버려진 기관총, 그리고 그 위로 쏟아지는 햇빛, 추수가 끝난 호밀밭 한가운데 조금 전에 총살된 시체에서 초록색에 가까운 회색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장면. 

(250) 빅토르는 그 이년의 세월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강렬하게 느껴지는지, 그리고 그 시절 그 여인들이 어떻게 이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예쁘고 착한 여섯 명의 아가씨들을 에워싼 공기 속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한 젊은 날의 에로티시즘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야흐로 청춘을 맞이한 그들에게는 커다란 의미였고, 그래서 그 여인들은 빅토르에 관해서라면 세세한 것까지 전부 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255) 헤겔의 단순한 이론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칸트의 어려운 사상을 탐독하곤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살아오면서 칸트나 베르그쏭을 인용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그때 이후로는 그런 책들을 전혀 들여다보지 않았다.

(268-269) 빅토르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말끔히 털어버리고 뭔가, 새로운 것을 붙잡고 싶었다. 그런데 그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던 것이다.

(283) “...내가 누군가를 그처럼 사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아. 지금은 상상초차 할 수 없는 일이지. 내가 보기에 모든 위대한 사랑에는 굴욕적이고 우스운 면이 있는 것 같아.”
“굴욕적인 면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빅토르가 천천히 말했다.
“그런데 우스운 면도 있다고?”
“굴욕과 웃음이 결합될 때의 그 어이없는 느낌을 너는 한번도 맛본 적이 없구나?”
“응, 한번도 없었어.”
“그것 봐. 그렇다면 너는 한번도 진심으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거야.”

(286) 그는 빌코에 와서 처음으로 스토크로치 농장을 떠올렸다. 그곳에는 힘겨운 노동이 기다리고 있지만, 대신 복잡한 선택이나 결정을 요구하는 난감한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안식처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여기서 그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은 쾌락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아직 저지르지 않은 죄악의 언저리를 서성이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기분을 들게 했다.

(297) 이제 빅토르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마치 다른 사람을 관찰하듯 즐기게 되었다. 어쩐 일인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제대로 그릴 수가 없었다. 지금껏 자기가 살아온 자취를 돌아보면 서 빅토르는 거기에 논리적으로는 메워지지 않는 벌어진 틈, 일종의 공백이 있음을 깨달았다. 1914년 그가 빌코를 떠나는 순간, 그때까지의 삶과 그후의 삶을 단절시키는 뭔가가 수직으로 강하게 내리꽂혔고, 그로 인해 그의 인생행로는 근본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다.

자작나무숲(야로스와프 이바시키에비츠)

(356) 하지만 스타시는 굳이 눈으로 푸른 하늘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푸른 하늘이 그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내리는 빗줄기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창가에 서서 검은 소나무 가지 위로 펼쳐진 회색 베일 같은 안개를 바라보는 순간, 자신의 몸을 관통하던 한기가 그를 기쁘게 했다.

(406) 어두운 현관방의 잿빛 바윗돌 아래에서 정말로 자신이 오래오래 잠드는 것을 상상하니 슬픈 감정이 밀려왔다. 그는 정말 어린애처럼 울기 시작했다. 베개가 눈물로 흠뻑 젖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 (타데우쉬 보로프스키)

(420) 아래쪽 판자침대에는 여덟 명, 혹은 아홉 명씩 뭉쳐서 누워 있다. 뼈만 앙상한 그들의 쇠약한 알몸에는 땀냄새와 똥냄새가 진동을 하고, 볼은 움푹 꺼졌다.

(427-428) 빗장이 벗겨지고, 객차 문이 열렸다. 신선한 공기의 물결이 열차 안으로 확 밀려들어가서 마치 독가스처럼 사람들을 강타했다. 그 속에는 모든 것이 숨막히게 꽉꽉 채워져 있다. 짐, 가방, 트렁크, 보따리, 상자, 궤짝, 온갖 종류의 꾸러미들(그들의 과거였고, 이제 곧 그들의 미래가 될 모든 것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촘촘히 쌓여 있고, 그 끔찍한 물건더미 사이사이에 사람들이 파묻혀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눌려서, 더위로 질식하고 기절한 상태로, 서로를 뭉개고, 짓밟고 있다. 그들은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우르르 쏟아져나와 마치 모래 위에 내던져진 물고기떼처럼 가쁜 숨을 몰아쉰다.

(436-437) 여기 한 여자가 걸어가고 있다. 서둘러 걸으면서도, 태연해 보이려고 애쓰고 있다. 분홍빛의 통통한 뺨을 가진 천사 같은 아이가 그녀의 뒤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열심히 달려간다. 하지만 따라잡을 수가 없자, 손을 뻗으며 와락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 엄마!”
“어이, 아이를 데리고 가야지?”
“제 아이가 아닙니다. 선생님, 제 아이가 아니에요!”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뛰어간다.


구름 속의 첫걸음(마렉 흐와스코)

(449-450) 평생을 그렇게 보내는 병적인 관찰자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관찰자의 얼굴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다가 일생을 마감한다. 그들은 이 세상이 잿빛이고 지루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깊이 한탄하면서 최후를 맞으면서도, 앉은 자리에서 과감히 일어나 이웃 마을을 둘러볼 수 있다는 생각은 통 하지 못한다.

459 말리셰프스키가 말했다. “고통을 두려워한 건 아니었다고 생각해. 그건 나중에 뒤따라오는 거니까. 인생, 다른 사람들, 소문…… 이런 것들이 두려웠겠지. 첫 경험, 그건 정말 구름 속에 있는 것 같으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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