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 모르는 엔딩(최영희)


8월 4~5일 국어 수업 디자인연수가 월곡중에서 있었다. 매년 개학을 2~3주 앞두고 학교는 다르지만 같은 학년을 지도하는 샘들과 새 학기 수업계획을 함께 세우는 이 시간이 참 소중하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품사의 종류와 특성’에 대해 공동으로 수업계획을 세웠다. 교과서 중심으로 개념을 확실하게 공부한 뒤, 도전 과제를 여러 개 제시하여, 탐구하며 기본 개념을 확실히 익히는 수업을 계획했다. 그 외  진도가 서로 달라 각자 궁금한 내용들을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다 성장을 다룬 단편소설과 이를 연극 수업과 연계하는 이야기를 좀 더 나누었다. 

 

나도 관련이 있어 중1 상황에 맞는 단편들을 이 블로그의 '단편집' 카테고리를 살펴보며 몇 편 선택한 뒤 다시 읽어보며 수준을 파악해 보려고 책장을 살펴보다 이 책을 발견했다. 누군가의 소개를 이 책을 구입해 놓고 나서 지난 여름 책정리를 하며 다락으로 옮기면서 눈에서 멀어졌나 보다.

책 표지가 쌔뜩하다.  SF 단편집에 딱 어울릴만한 표지였다. 우주선이 영사기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우주인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 인간을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인 듯싶었다. 제목 "너만 모르는 엔딩"도 자극적이다. 나만 모르는?

그래서 책을 들었다. 5편의 이야기를 읽으며 SF소설의 재미를 느꼈다. 사실 소설 자체가 현실의 바탕으로한 가공의 세계이니 SF적인 요소는 조금 더 새롭게 가공한 것이겠다. 
외계인도 어찌지 못한다는 ‘중딩’들이 학교생활을 통해 든든한 삶의 배경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물론 바람으로만 끝나면 안 되겠지만. 

 


1.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
스케일이 크다. 우주적인 이야기이다. 지구를 관광지로 만들려는 알파켄타우리 크룹인들에게 외계인도 건드릴 수 없는 가장 큰 위협세력 ‘대한민국 중딩’이 있다는 첩보가 들어온다. 자기중심적이고 공격적이며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유니폼을 입는 대한민국 중딩들. 그런데 실상은 오늘을 살아가는 중딩들에 대한 기성세대들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니 크룹인들의 위협세력은 ‘태극기 노인’들이었다. 외계인의 눈으로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중딩들에 대한 어른들의 편견이 너무 쎄다. 부모든, 교사든, 노인들이든 모두 중딩들을 까기만 한다. 존재로서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세대적 편견에 대한 항변을 이렇게 유쾌하게 풀어낼 수 있다니 대단하다.

(21) 하지만 저 어린애는 절대 대한민국 중딩일 리가 없었다.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라는 정서적 특징에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저 어린애가 '중딩'이라면 저 노인 대신 자신을 트룹행성으로 데려가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공무원은 어린애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저 펄떡거리는 어린 지구인에게 존재 대 존재로('인간 대 인간'과 같은 의미) 다가가고 싶었다.

 


2. 최후의 임설미
역시 우주적인 스케일에 지구를 침공하려는 츠바인과 모종의 합의를 했는데, 삼선 슬리퍼와 큰 관련이 있다. 대한민국 학교의 실내화의 표준이 된 삼선 슬리퍼를 비롯해 용의 규정, 모범생에 대한 풍자가 상당하다. 지구의 역사가 그렇듯, 돌연변이와 소수에게 관대해지자. 지구를 지키는 힘은 다양성이다.

(49)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 없다.

 


3. 너만 모르는 엔딩
역시 우주적인 스케일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점집을 차린 외계인 ‘흡씨’는 평행우주 이론을 바탕으로 요구자들이 생각하는 삶에 대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일단 이름이 ‘흡’씨여서 재미있었다. 모든 경우의 수를 흡수해서 찾아낸다는? 이 이야기에 어울리는 말은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다. 호재가 미래의 삶에 절대 엮이고 싶지 않았던 깨복쟁이 친구 민아는 역으로 호재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과 새로운 상황 속에서 익숙한 인물에 대한 새로운 계기가 생긴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온갖 가능성의 분기점을 만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의도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지만 노력을 해 봐야 한다.

(81) "이번 주 일요일에 영화만 한 편 같이 보시면 됩니다. 상영관에 들어가기 전에 우연을 가장하여 민아 양의 손을 잠시 잡으면 됩니다. 그 사소한 스킨십을 통해 민아 양은 호재 군이 그저 친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 분기점을 무사히 지나면 두 분은 부부가 될 확률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우주들로 들어서게 됩니다.
(104) 앞으로 온갖 가능성의 분기점들이 펼쳐지겠지만 호재는 민아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호재는 사진 속 민아와 눈을 맞추었다.
지켜봐.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있는 곳으로 우주를 몰아갈 테니까.

 

 

4. 그날의 인간 병기
심각한 학교폭력의 문제를 역시 유쾌하게 다루고 있다. 이런 슈트가 있으면 좋겠다. 국가와 법이 섬세하게 개인을 보장해 주지 못하니.

(130) "이름 박희대. 종대부고 1학년. 금란PC방 외상값 10만8천원. 최훤 학생을 괴롭혀 자퇴에 이르게 한 주동자. 그러고도 사과 한 마디 않는 철면피 자식."
"너....... 너 뭐야?"
희대의 목소리가 떨렸다. 평소 희대의 왼팔, 오른팔을 자처하던 두 녀석은 벌써 내뺄 기미를 보였다.

 


5. 알파에게 가는 길
대체 인간이 주인공으로 나와 있지만 인간의 이야기로 읽힌다.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의 나의 배경이 되는 기억, 즉 삶의 이력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다. 이야기에서 원래 인간은 알파이며, 대체 인간은 베타로 명명된다. 과거는 과거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든든한 배경이 되는 것 같다. 성장 과정 어디에서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존재로서 인정받았던 그때인 것 같다. 관계 속에서 알파와 베타는 하나다.

(146) “진정해라 미카. 생존을 위해서였다. 도망자가 되기 전의 기억들이 네 발목을 잡을지도 모르니까. 호기심에 전에 살던 데를 찾아간다거나, 우연히 전에 알던 사람을 만나면 너도 모르게 아는 척을 한다거나. 그래서 본래 기억을 지웠다. 그리고 인공 기억은... 너라는 사람을 성립시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사람이든 대체 인간이든 과거의 기억이 있어야 지금의 ‘나’가 설명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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