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깜언(김중미)

'깜언'은 베트남 말로 '고맙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야기의 서술자, 유정이는 언청이(구순구개열)로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지만, 할머니와 작은아빠 가족, 살문리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과 살면서, 타인에 대해 들고 있던 자신의 방패를 거두게 된다. 열일곱의 시작이다.유정이의 성장에는 강화도라는 배경의 힘이 크다. 몰락하는 농촌 공동체 속에서 그래도 희망은 사람이다.
이야기는 먼저 우리나라 농업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미국, 중국 등 계속되는 자유무역(FTA)을 통해 전체적으로 형편은 나아질 수 있겠으나 농촌은 계속 피폐되고 있다. 대형마트에 홈쇼핑에서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프리카근처에서 잡은 갈치, 폴란드산 삼겹살, 칠레의 과일을 먹는 것이 익숙한 현실이 되었으나 개방의 이익과 분배, 그 과정에서 농촌의 패배감은 이야기되지 않고 있다. 거대한 경제 속에서 농업은 먹을거리라는 생존의 문제보다는 손익 계산에 따라 재편되고 있다. 특히 축산물의 수출을 위해, 필요 이상으로 대량 살처분되는 가축(구제역, 조류독감 등)의 이야기는 경제적인 손실을 넘어 생명의 존엄성과 귀책의 문제가 느껴지기도 한다.이런 상황 속에서 농업과 농촌은 패배적이고 무기력한 분위기가 지배한다. 교실의 수업 분위기가 그러하며 장기적인 진로 계획 속에서 삶을 설계하는 것이 아닌 직업에 대한 편견을 보이는 대로 따르려 한다. 의지와 전망을 가지고 농촌 공동체를 일으키려는 사람(작은아빠, 광수 아빠)들도 정책의 실패나 혼선, 농지의 전용 등으로 좌절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무겁다.이런 상황 속에서 희망을 꿈꾸는 건 가족과 공동체 속에서 얽히고설킨 관계의 힘이지만. 즉 서로가 서로에게 살 힘을 얻게 되는.

(51)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던 젖소들을, 두 번이나 생매장을 한 것이다. 광수 아버지가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던 날, 광주는 은행나무 아래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광수 아버지 역시 구제역에 걸리지도 않는 생때같은 소가 죽어 가는 것을 보다 끝내 통곡을 했다고 했다. 그날 저녁 광수 아버지와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온 작은 아빠가 목이 메어 말했다.
"자꾸만 그 소 눈망울이 떠올라 미치겠어. 그놈드이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 까닭을 알기나 하느냐고. 구제역이 발생한 데서 3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소들은 병이 걸리지 않았는데도 죄다 살처분하라니. 정말 가엾어서.. 세상에 인간만큼 잔인한 동물도 없을 거야."

(89) "우리 아빠가 농사짓지 말래요."
"맞아요. 저희 부모님도 이제 농사는 끝이래요."
"공장 가면 돈도 많이 못 벌고 매여 있어야 하잖아요."
"왜 우리가 공장에 가요? 왜 우리 무시해요"
"우리가 시골 산다고 인생에서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둘씩 잠에서 깬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투덜거렸다. 선생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얘들아, 농민이 되고 노동자가 되는 게 왜 실패야? 너희도 제발 신문 좀 읽고, 컴퓨터로 게임하고 만화만 보지 말고 뉴스도 좀 봐. 이 정보화 시대에 너희는 도대체 제대로 된 정보를 아는 게 없니. 세상을 알고, 현실을 알아야 너희도 뭔가 의지가 생기고 그러지. 제발 정신 좀 차리자."

또 다문화가정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고민하게 한다.유정이 작은아빠는 베트남 사람과 결혼한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고, 작은엄마의 사촌도 국제결혼을 하지만 무기력과 폭력성을 감춘 사기결혼으로 정신적, 육체적 괴로움 속에서 베트남으로 돌아간다. 광수아빠는 조선족 사람과 결혼한다. 광수엄마는 중국에 아들이 있으면서도 속이고 결혼했고, 이 아이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광수를 버리고 고시원과 식당을 전전한다.
이미 여러가지 사정으로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일시적으로, 장기적으로 들어와 있다. 그런데도 '다문화'라는 용어 자체가 비아냥의 말로 불린다. 작은아빠의 아들 용민이는 '다문화'라 불리며 따돌림을 당하고, 그 원인이 되는 엄마와 베트남에 대해 원망한다. 뒤섞여야 더 크고 다양한 힘을 얻는다는 건 진화의 기본이다. 국적과 피부색에 대한 차별이 오래되었다. 하지만 잘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장례 풍습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고 있다. 다문화가정과 외국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도 장기적인 정책 속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131) "그래, 나도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그렇지만 유정아, 작은엄마는 베트남 사람이야. 베트남 사람이 한국 사람이랑 결혼한 것뿐이야. 나랑 결혼했다고 작은엄마가 무조건 한국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작은엄마가 작은아빠랑 결혼할 땐 당연히 한국 사람으로 살려고 온 거 아냐?"
"그런 건가? 사실 용민 엄마랑 그런 얘길 해 본 적은 없어. 그렇지만 나는 네 작은엄마가 나랑 결혼해서 이렇게 잘 살아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이름 바꾸고 그러는 건 네 작은엄마가 먼저 하겠다고 말할 때까지는 그냥 놔두고 싶어. 그리고 나는 용민이가 더 크면 용민이한테 베트남에 대해서도 알게 해 주고 싶어. 베트남에도 데려가고, 엄마한테도 베트남 말도 배우게 하고 싶고. 작은엄마 혼자 한국에 와서 한국 음식만 먹고, 한국말만 하고, 한국 문화대로만 살고, 손해잖아. 나는 가끔 우리도 베트남 말을 배워서 말을 반반씩 섞어서 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

언청이라는 콤플렉스, 그래서 자신을 버렸던 부모, 버리려 했던 할머니에 대한 원망, 자신의 아픈 곳을 콕콕 찔러 놀렸던 광수. 하지만 그들 때문에 인생이 꼬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 덕분에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성장이지 않을까.

(311) 언제부턴가 나는 손에 보이지 않는 방패를 들고 서 있다가 누군가가 내게 다가오려면 밀쳐 냈다. 누군가가 나를 공격이라도 할까 봐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래야 내 마음이 다치지 않고, 외롭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그 사람들은 나처럼 주먹을 쥐고 있지도 않았고 방패를 들고 있지도 않았다. 작은엄마도, 광수도, 용민이와 용우도 빈손이었다. 섭섭하다면 섭섭하다고 말하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말했다. 나만 혼자 주먹에 잔뜩 힘을 주고, 감당하지 못할 만큼 무거운 방패를 든 채 힘겨워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멋쩍어졌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방패를 치우고 주먹도 슬쩍 폈다. 그렇게 할머니한테 대들어 보기도 하고, 작은엄마에게 다가가 말도 걸었다. 그러자 작은엄마가, 용민이와 용우가 다르게 보였다. 할머니의 무뚝뚝한 말투에 숨은 마음도 보였다. 나는 그렇게 열일곱이 되었다.

(318) "유정아. 있잖아, 나도 어렸을 땐 몰랐는데 말이지, 살다 보면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참 많아. 너나 네 엄마에게는 참 힘든 시간이었을 테지만 나는 네가 있어서 이만큼 살았다. 군산에서 공장 다닐 때 노조에 가입해서 파업하다고 해고당하고, 사귀던 여자한테 차이고 많이 힘들었거든. 그때 네가 있어서 이 악물고 살 수 있었어. 네가 있어서 농사일을 할 마음도 먹게 된 거고. 결혼으 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너 때문이었어. 너 아니었으면 내가 용민 엄마 같은 여자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너는 내 은인이야. 네가 잘 커 줘서 그것만으로도 고마워. 너는 내 딸이야."
모두 깜언
국내도서
저자 : 김중미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15.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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