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이꽃님)

 

색다르게 읽은 책이다전남공공도서관을 통해 '밀리의서재'를 3개월 이용할 있게 되었다. '부산' 관련 전자책을 두 권 정도 읽다, 요 며칠 내린 눈으로 차에 묻은 제설제를 씻으려 가는 길에 오디오북을 실행했다. 1학년들이 많이 읽었던 책 중 이 책이 오디오북으로 지원되고 있었다.

세차장 가는 길에서, 세차하는 동안, 다시 돌아오는 길에서 오디오북을 듣는데, 성우의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듣다 보니 소설의 내용이 잘 그려졌다. 그러다 뒷이야기가 궁금해 끊고, 전자책을 펼쳐 책을 마저 읽었다. 그리고 인상적인 구절을 정리하기 위해 종이 책을 대출해 다시 훑었다.

 

이야기는 하지오와 유찬이 시점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하지오가 좀 더 중심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제목도 그렇고.

지오는 미혼모 엄마의 건강 악화로 새로운 가족을 꾸린 아버지가 사는 시골 학교로 전학을 온다. 아빠는 자신을 이웃들에게 먼 조카라고 소개한다. 유찬이는 큰 화재로 부모님을 잃은 뒤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부모님을 앗아간 화재의 원인과 이후 진행 상황을 속속들이 알게 되며 오히려 괴로워한다. 홀로 동생을 챙기는 새별이는 자신의 어려운 형편을 헤아려주고 지원해 주는 마을사람들을 위해 절박하게 운동을 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들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 서서히 드러난다.

 

작가의 말에서도 이야기되었듯 이 소설에는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다. 삶을 송두리째 바꿀만한 선택도 있고, 티격태격하는 수준의 선택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소통의 과정이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과정이 되고 있어 이야기가 참 밝다. 

 

나이를 먹을수록 오래전에 했던 선택의 순간들을 더 많이 복기한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자꾸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선택을 경험하면서 선택의 결과에 대해 조금 더 너그러워지고 있다. 선택의 경우의 수를 따지기에 이제 힘이 부치고 머리만 더 복잡해지며, 또 살아보니 선택의 순간은 언제든 당황스러우며 뜻한 바와 다를 때가 많다는 것을 직접,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상이 다 그렇다는 득도의 경지는 당연히 아니다. 선택의 결과에 대해 평가하기보다는 선택의 순간을 헤아려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유찬이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초능력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시골 마을공동체의 특성으로 읽힌다. 공동체 바깥에 있었는 지오의 마음만 유찬이가 읽을 수 없다는 것도 그런 면에서 설득력 있는 설정이다. 어쩌면 유찬은 선택을 위해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제목을 참 잘 지었다.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동행의 한 걸음을 이렇게 상징적으로 표현하다니!!

 

(128) 어렵고 힘든 것들이 늘 그러하듯 답이 없는 문제는 언제나 가슴을 세게 짓눌렀다. 어쩌면 아무것도 모른 채 원망만 하는 게 가장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맞다. 나는 늘 원망하는 쪽이었다. 엄마가 아픈 게 내 탓이라고, 날 버린 아빠와 사는 게 화가 난다고, 잘하는 건지도 모를 유도를 붙잡고 있는 게 버겁다고 징징대며 탓하기만 했다.

(139) "하나를 지키려면 하나를 잃기도 한대. 엄마가 나를 지키려고 아빠를 잃었던 것처럼. 근데 아빠는 엄마를 잃었는데 유도를 지키지 못했대. 지킨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두 개나 잃은 거지. 억울했을  같은데 코치님이 그러는 거야. 선택이라는  그런 거라고. 언제나 옳은 선택만  수는 없는 거라고. 그래도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고." (중략)
"네 선택이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선택을 해야만 하면? 널 고통스럽게 만든 사람이 좋은 사람이면? 그 사람한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데 그 사정을 네가 모두 알게 되면, 그러면 어떨 것 같아?"

(164) "내 다 알고 결혼했다. 코딱지만 한 동네에서 모를라 캐도 모를 수가 있어야지. 언제 말할란가 기다렸드만, 생각보다 늦게 말한데. 거짓말도 몬 하는 양반이 오래도 버텼다."
아줌마가 콧잔등을 찡그리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먹고 싶은 반찬 있으모 말해라. 해 줄게."
확실히 알겠다. 선함은 다른 사람까지 선하게 만들고야 만다는 것을.
이제 예전처럼 상처받고 아파하기만 하는 건 그만둘까 싶다. 미움과 분노는 때때로 찾아들겠지만 거기 매여 잇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볼 생각이다. 까짓것, 못 할 것도 없지.

(171) 놀라운 건 이런 거다.
내 온 마음을 다화는 순간부터 세상은 변하기 시작한다는 거. 그리고 나는 그걸 절대로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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