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하, 나의 엄마들(이금이)

 

전국교사대회에 참여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큰아들과 남산 근처에서 하루를 보냈다. 날마다 부쩍 커 있는 아들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재미있다. 남산에 올라 서울을 조망하고 돈가스를 먹은 뒤 서울역에서 헤어졌다. 생각보다 일찍 용산역에 도착했다.

예약해둔 기차 출발시각까지 여유가 있어 용산역 광장으로 통하는 계단에 매트를 깔고 앉았다. 아직은 오월이라 그늘은 제법 선선했다. 바람을 쐬며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읽기 시작했다. 머나먼 타국에서의 삶에 일제강점기라는 상황이 더해져 이야기는 불안 불안하면서도 재미있었다. 그리고 광주송정역까지, 집에 도착해서도 줄곧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책은 가급적 피하고 싶다. 책 속 상황을 견디는 게 너무 힘들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그런 부담이 적었다. 하와이까지 '사진'만 보고 결혼하러 떠나는 심정이 어땠을까? 중매쟁이의 말을 믿을 수밖에는 없는 상황이 당시 조선의 현실을 빗댄 것처럼 느껴졌다.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모든 백성이 힘들겠지만 가난한 백성에게는 수탈이 더해질 테니. 힘겨울수록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도 더 커지고 실행력도 커질 것이다. 그러나 하와이로 떠난 이주민들이 더 편하게 살기만을 원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꿈'을 꾸었기 때문에 떠날 수 있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멕시코 이주민의 삶을 이야기했던 "에네껜 아이들(문영숙)"에 비해 하와이 이주민의 어려움은 덜 그려졌다. 대신 타국에 있기에 자신의 뿌리인 조선이 당당하게 서길 바라며 독립을 지원하는 모습, 그리고 힘을 합쳐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도 생각의 차이로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장면은 안타까웠다. 물론 하와이 이주민들도 책으로 상상이 되지 않는 억척스러운 삶을 견뎌낸 끝에 하와이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던 부분은 버들의 남편, 서태완의 안녕이었다. 또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는 버들의 큰아들 정호의 군입대도 큰 문제였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반전이 있었다.

종교, 이념과 상관없이 우정을 끝까지 유지하는 억척스러운 세 여성의 이야기는 이야기 말미 딸의 목소리로 바뀌며 반전과 함께 '나의 엄마들'이라는 제목과 연결된다. 갑작스러운 서술자의 변화가 이 소설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민 1세대와는 다른 성장 환경을 바탕으로 세대 차이, 세대 간의 소통을 나타낸다는 면에서 긍정적이지만 좀 갑작스럽기는 하다. 

아침에 출근할 때 인천시에서 '재외동포청'을 인천에 건립해야 한다는 광고를 여러 번 접하면서, 1902년에 인천 제물포항에서 102명이 이민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알로하, 나의 엄마들"의 이야기다.

샘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다 등장인물의 이름인 버들이, 송화, 홍주 등의 이름이 독립후원금 영수증에 나와 있는 이름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남편들의 이름까지도(태완이는 제외하고). 작가의 힘은 참 대단하다. 이야기의 작은 부분에서까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 그래서 실감난다.

 

*인상적인 구절

(343) 엄마는 조선을 떠난 지 이십 년이 넘었는데 말은 물론 조선식 생각과 생활 방식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자식 이름은 영어로 지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엄마는 조선 이름으로 우리 남매들을 부른다.) 그나마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모 역시 한인이었다. 한인들과 미국인들은 나이뿐 아니라 이름을 적는 방식도 달랐다. 자기 이름보다 성을 먼저 쓰는 한인들은 개인보다 가족을, 가족보다 나라를 우선으로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 말이다.) 날짜를 표기할 때도 연도가 먼저다. 오늘보다 과거나 미래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 같은 사람 말이다.)

(365) 훌라 선생님은 우리에게 춤뿐 아니라 알로하 정신과 레이의 의미도 가르쳐 주었다. 어디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알로하'라는 말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었다. 배려, 조화, 기쁨, 겸손, 인내 등을 뜻하는 하와이어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었다. 그 인사말 속에는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며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원주민의 정신이 담겨 있다고 했다. 
레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카네이션 농장 집 딸이라 그런지 더 관심이 갔다. 레이 또한 단순한 꽃목걸이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두 팔로 안는 것과 같은 의미의 레이는 사랑을 뜻했다. 원주민들의 풍습이었던 레이는 레이 데이가 있을 정도로 널리 퍼진 문화가 되었다.

(396) 엄마는 가난해서 팔려 오거나 일본 없는 세상에서 편히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처럼 꿈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비록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엄마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인천 한인 이주 관련 기사: http://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24859

 

[연재] 1902년 인천 제물포항서 121명 출발, 한국 첫 이민 - 인천투데이

인천투데이=김현철 기자│‘디아스포라’는 특정 민족이 자의 또는 타의로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1883년 개항 이후 당시 제물포항 인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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