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지바고 2(보리스 페스테르나크)

 

 

 

쉽게 읽어갈 줄 알았는데, 파르티잔에 끌려간 대목에서 무척이나 어렵고 지루하게 겨우겨우 읽어 나갔다. 지금 돌아보니, 지바고에게도 가장 의미 없고 힘들고 잔인한 시절이었기에 표현된 언어들도 어렵고 힘들게 작성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읽을수록 지바고가 살아간 시대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대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속에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도.

전쟁과 혁명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작가가 되고 싶은 의사로서 혁명의 중심에서 벗어나 겨우겨우 피해 가는 식으로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소시민 지바고. 또 심지어 불륜까지 저지르는 지바고는 정말 손가락질 당할 만한 캐릭터이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지바고가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하는 나는 도대체 뭐지?

그럼 코로나19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재난의 시대에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방역과 교육,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인 안전 이 두가지 속에서 방역을 위해 교육을 후퇴시키고, 사회적인 안전을 위해 개인적인 삶을 희생시켜야 하는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인상 깊은 구절>

(101) 그는 토냐를 숭배한다 할 정도로 사랑했다. 그녀가 지닌 마음의 평온과 안정은 그에게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그는 그녀의 친아버지보다 그녀 자신보다도 더 그녀의 명예를 지지했다. 그녀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녀를 모욕한 사람을 자기 손으로 갈기갈기 찢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바로 자신이 그런 사람이었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있으면 발각되지 않은 죄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집안 식구들이 변함없이 상냥하게 대해 주니 죽을 것만 같았다. 공통의 대회가 무르익을 때면 갑자기 자신의 죄가 떠올라 온몸이 뻣뻣해지고 주변의 소리가 들리지도, 이해되지도 않았다.

✎ 이런 상황, 이런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하나? 솔직히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결국 마지막에 라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토냐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큰 것처럼 표현하는데...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에 반발감이 생기지도 않는다.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또 한 명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설정 자체만으로도 참 어려운 소설이다.

 

(104) 굳이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취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털어놓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꼭 오늘 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을까? 아직 토냐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다. 해명은 다음번으로 미루어도 늦지 않다. 그러는 동안 그는 다시 한번 시내에 나갈 것이다. 라라와의 대화는 모든 고통을 상쇄할 만큼 깊이 있고 성의 있게 끝까지 이어질 것이다. 오, 너무 좋다! 정말 기적이다! 전에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이건 뭐지? 이런 상황 너무 익숙하다. 내가 저지른 나쁜 일을 누군가에게 꼭 털어놔야 하는데, 마음속으로 다짐만 하다가 불안하고, 다시 언젠가는 꼭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안심하고, 또 나쁜짓 하러 가고.

 

(158) 하지만 오, 끔찍해라! 의사가 아무도 안 맞히려고 해도 아무리 조심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저런 사람이 공격 중에 그와 나무 사이로 들어와 발사의 순간에 조준선을 가로질렀다. 그는 두 명을 맞혀 부상을 입혔고 나무 옆에서 나뒹군 세 번째 불운아, 이자는 목숨을 잃었다.

(196) “잘못했어요., 형제들, 좀 봐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해치지 마세요. 죽이지 마세요. 나는 아직 살아 보지도 못했어요. 죽기엔 너무 젊잖아요. 아직 좀 더 살고 싶고, 엄마, 우리 엄마도 한 번 더 보고 싶어요. 용서해 주세요, 형제들. 좀 봐주세요. 당신들의 두 발에 입을 맞출게요. 물도 내가 다 길어다 드릴게요. 아, 큰일이야, 큰일이야, 큰일, 끝장이야, 엄마, 엄마.”

 (2)권에서는 죽은 줄로 알았던 사람들이 우연 혹은 행운을 통해 살아난 이들이 꽤 등장한다. 여기 이 젊은 백군 병사 세료자와 그리고 배신으로 총살형을 당한 미성년 갈루진. 196쪽 갈루진의 외침은 가장 가슴 아픈 장면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살아난 것으로 보고 얼마나 반가웠던지.

(237쪽 지바고가 고생하며 철길따라 가다 우연히 만남)

 

(166) 이 모든 속된 것, 이 모든 표현이 내 적성에는 안 맞아요. 나는 A라고는 말하겠지만, 능지처참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B라고는 말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들이 러시아의 횃불이자 해방자이며 당신들이 없으면 러시아는 빈곤과 무지의 진흙탕에 빠져 가라앉으리란 건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당신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침이나 뱉어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런 말을 어떤 각도에 바라봐야 할까? 뭔가를 이끌어가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한심하고 나태한 이기주의자일 수도 있고, 가족과 생이별하며 의미도 없고 보람도 없이 강제적으로 할당한 의무를 해야하는 사람의 입장이라면 얼마나 무의미한 시간 낭비일 뿐이란 말인가?

 

(278) 스트렐니코프가 다시 파센카 안티포프가 된다면, 그가 광기와 반역을 멈춘다면, 시간이 뒤로 돌아간다면, 세상의 끝처럼 어딘가 먼 곳, 파샤의 책상 위에 램프와 책이 놓여 있는 우리 집 창문이 기적처럼 밝혀진다면 난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그리로 갈 거야.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충격적인 대목이었다.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라라의 입을 빌려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가정의 일상을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작가의 마음을. 그리고 또 라라의 입을 빌려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뒤이어 한다.

 

(280) 그때 거짓이 러시아 땅에 찾아왔어. 가장 큰 재앙, 즉 미래의 악의 뿌리가 된 것은 자기 견해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상실됐다는 거야. 도덕 감각의 영향을 좇던 시대가 지나갔다고, 이제는 공통의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야 하고 모두에게 강제된 남의 관념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상상한 거야. 처음에는 군주제의 미사여구가, 나중에는 혁명의 미사여구가 승승장구하기 시작했어. ~ 항상 우리 집을 채웠던 자유분방한 활기 대신 바보 같은 웅변조가 우리의 대화에도 침투하여, 의무적인 세계 주제를 두고 어딘가 과시적이고 의무적으로 똑똑한 척 굴게 된 거야.

 이것도 작가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한다. ‘공통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대화 속에 웅변이 침투하는 상황으로 시대를 적확하게 표현했다는데 동의한다. 위의 두 대사가 () 권의 가장 핵심적인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337) 유리 안드레예비치는 행복을 잔뜩 머금고 달콤한 생명의 숨결을 내뿜는 축복받은 고요에 에워싸여 있었다. 램프 불빛이 하얀 종잇장 위로 고요한 노란빛을 뿌리고 황금빛 얼룩처럼 병 속의 잉크 위를 떠다녔다. 창문 너머에서 싸늘한 겨울밤이 비둘기 빛을 띠었다.

 지바고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닌가 생각한다. 노란빛, 비둘기빛으로 표현된 고요하고 아름다운 겨울밤의 고즈넉한 평화와 행복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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