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지바고 1(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는 개인적으로 소소한 인연이 있다.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중학생 시절 영화음악을 즐겨듣던 중 라라의 테마가 너무 아름다워서 영화는 못 보더라도 책은 꼭 읽어야겠다 생각했었다. 그래서 중앙여중 도서관 문을 처음으로 두드렸는데, 이 책은 대출이 되지 않는다며 당시 폐가식 대출 창구의 조그만 창문으로 냉담한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아직 중학교 수준에서는 읽을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이후로도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신청했지만 결코 볼 수 없는 금단의 서적이라는 것을 각인시킬 뿐이었다.

 

그 뒤로 간혹 TV에서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도, 책보다 먼저 보고 싶지는 않아서 다른 채널로 돌려버린 기억이 있다그런데 그 전엔 그렇게 읽고 싶었던 책이, 숙제처럼 내 손 앞에 놓이니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바쁘게 살아가다 우연히 책을 펼쳤는데, 어머니를 잃은 어린 유라의 마음이 갑자기 훅 꽂혀오는 것이 아닌가그렇게 읽어가다 보니, 격동의 시대를 묵묵히 착하게 건너가는 유라와 라라가 마음속 깊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결말이 결코 해피엔딩이 아닐 거라는 것이 분명하지만 두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지, 사랑할지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그리고 푸시킨,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체호프를 지나 파스테르나크라는 새로운 작가를 만나게 되어 정말 기뻤다. 문체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소설임에도 시처럼 생생하게 마음속에 젖어 드는 구절들이 왜 그리 많은지? 게다가 문희숙 선생님의 말씀처럼 19세기 러시아를 지나, 솔제니친 작품으로 이어진 중간의 징검다리를 만난 것 같기도 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 있는 작품을 만난 것 같아 즐거운 독서시간을 가졌다.

어쨌든 2편이 기대된다.

 

<인상 깊은 구절>

(18) 폭풍우는 윙윙거리고 울부짖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라의 주의를 끌려고 애썼다. 하늘에서 하얀 옷감이 무한히 실을 감듯 빙빙 돌면서 떨어져, 수의처럼 땅을 친친 감았다. 온 세상에 눈보라 하나뿐, 그 무엇도 그것과 겨룰 수 없었다.
창턱에서 기어 내려오자마자 유라는 맨 먼저 옷을 입고 거리로 뛰쳐나가려 했다. 수도원의 양배추가 쓸려 가 못 캐게 되지나 않을까, 눈보라가 들판의 엄마를 덮치면 너무 약해진 엄마가 저항 한 번 못하고 소년에게 더욱더 멀리, 깊은 땅속으로 떠나 버리지나 않을까, 화들짝 놀랐던 것이다.
이번에도 일은 눈물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외삼촌이 잠에서 깼고, 그리스도 이야기를 하며 소년을 위로한 다음 하품을 하며 창가로 다가가 생각에 잠겼다. 그들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 날이 밝아왔다.

 

 고행을 하면서 책을 읽을 때 첫머리가 기억 나는 고전들이 몇 작품 있는데, <두 도시 이야기> <안나 카레니나> 등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대부분 의미심장한 문구로 강렬하게 다가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았던 <닥터 지바고>의 장례식 첫머리. 그리고 어린 유라의 성모제 전날 밤의 슬프고 짠한 이야기가 갑자기 마음속으로 훅 들어오면서 <닥터 지바고>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주인공이 얼마나 감성적이고 따뜻하고 인간적일까 하는, 그리고 어떻게 변해갈까 하는 그런 기대감.

, 그리고 문체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시인을 꿈꾸었던 작가의 감성이 곳곳에 묻어나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와는 차원이 다른 러시아 소설이 등장했다는 느낌이 들어 정말 신선했다.

 

(38) 아버지는 이자가 저명한 부호에 호인이며 이미 절반은 책임 능력을 상실한 미치광이라고 했다. 그는 미샤가 있든 말든 개의치 않고 미샤와 동갑내기인 자기 아들과 고인이 된 아내 이야기를 한 다음, 역시나 버려 버린 두 번째 가족 이야기로 옮겨 갔다. 여기서 그는 뭔가 새로운 것을 떠올리고는 공포에 질린 듯 창백해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횡설수설했다.
미샤에게 그는 설명할 수 없는 분명히, 그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 예정된 감정의 반영인 듯한 상냥함을 보여 주었다. 수시로 무언가를 선물했고, 그러기 위해 가장 큰 역에 정차할 때마다 도서 판매대가 있고 장난감과 지역의 기념품을 파는 일등급 대합실에 다녀왔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와 다른 또 하나! 바로 디테일한 구성. 유라와 친구들이 놀던 곳에서 약간 떨어진 기찻길에서 일어난 자살사건으로 우연히 멈춘듯한 그 기차에 유라의 아버지가 타고 있었고, 자살한 사람이 다름아닌 아버지 지바고였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져주고 있다. 그러면서 버린 자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이 짧은 순간에도 보여주고 있다니!! 가끔 지루할 정도로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복잡하면서도 필연적인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34) 다른 사람들 속의 인간이야말로 인간의 영혼입니다. 바로 그것이 당신이며, 당신의 의식은 평생 동안 바로 그것을 호흡하고 섭취하고 또 흠뻑 마셔 온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 당신의 불멸, 다른 사람들 속의 당신의 삶으로써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다고요? 당신은 다른 사람들 속에 있었고 또 다른 사람들 속에 남을 겁니다. 훗날 그것이 기억이라고 불리게 된들 당신에게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미래의 구성체 속으로 들어간 당신일 텐데요.

 

 주인공이지만 말이 그닥 많지 않은 유라가 처음으로 방언 터지듯 길게 한 말 중에 일부분이다. 미래의 장모가 될 안나 이바노브나가 병상에 누워있을 때 혼잣말처럼 들려주는 이야기인데, 유라의 인간관을 드러낸 부분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읊조리는 말이지만, 죽음의 문턱에까지 들어선 병자에게 큰 위안이 되었을 것 같았다. 결국 안나는 다음 날 상태가 좋아졌다.

 

(146) 라라는 노반을 따라 순례자들과 성지 참배자들이 다져 놓은 오솔길을 걷다가 숲으로 난 풀밭의 샛길로 접어들었다. 거기서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살짝 감은 채 광활한 주변 들판의 여러 향기가 뒤섞인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가깝고 연인보다 훌륭하고 책보다 현명했다. 한순간, 존재의 의미가 다시 라라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가 여기 있는 것은, -- 하고 그녀는 간파했다 --대지의 광기어린 매력을 파악하고 모든 것을 그 이름으로 불러 주기 위해, 만약 그것이 힘에 부친다면 삶을 향한 사랑 때문에 자기 대신 이 일을 해 줄 자손들을 낳기 위해서임을.

 

 라라가 콜로그리보프 집안과 여름여행을 떠나고 혼자 걸어가는 장면이다. 그 동안 코마롭스키에 얽힌 운명에 나약하게 끌려갈 것만 같던 라라가 가정교사를 선택하는 장면에서도 놀랐지만, 이상하게도 이 장면-혼자 걸어가는-에서 라라의 당차고 꿋꿋한 내면이 느껴져 더욱 놀라웠다. 작가가 묘하게 인물들의 매력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마법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표현도 어찌다 새로운지! 공기를 마시면서 아버지 어머니보다 가깝고 연인보다 훌륭하고, 책보다 현명하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지?

 

(171) 뒤에서 천천히 걸음을 떼는 저 사람들 사이에서 죽음이 가져온 허탈함에 답하듯, 깔때기처럼 소용돌이치며 심연을 향해 질주하는 물의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그는 몽상하고 생각하고 열심히 형태를 다듬고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싶었다. 예술은 끊임없이 두 가지를 탐구한다는 것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분명히 와닿았다. 예술은 집요하게 죽음을 사유하고 그로써 또 집요하게 삶을 창조한다. 위대하고 진정한 예술은 <요한묵시록>이라 불리는 것, 그것을 마저 쓰는 것이다.

 

 지바고가 정말 의사가 맞을까? 장모의 죽음으로 그가 떠올린 것은 예술에 대한 절절한 창조욕구였다. 죽음을 사유하고 삶을 창조하는 태도야 말로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이었고, 지바고는 여러 차례 경험한 죽음 속에서 새로운 삶을 위한 예술을 사유하고 있었다.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

 

(176) 그녀에게는 항상 뭔가 평범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분명코 그녀의 인생을 민감하게 구제 불능의 불구자로 만들어 놓지 않았던가! 운명을 자기 식으로 개조하고 처음부터 다시 존재해 보려는 열망을 불태우며 그녀는 미치도록 몸부림치고 있다. 줄곧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반항하고 있다.

 

 , 정말 쏠 줄 몰랐다. 대단한 캐릭터다. 심지어 가해자인 코마롭스키도 혀를 내두를 정도. <죄와 벌> 라스콜리니코프의 여동생 두냐를 닮았는데, 더 입체적이다.

 

(198) 보통 사람들보다 천장 쪽으로 더 높이 올려진 채 토냐는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연기를 뿜어내듯 고초를 겪은 자의 증기 속에 빠져 있었다. 병동 한가운데 높이 솟아 있는 토냐의 모습은 만 한가운데서 이제 막 닻을 내리고 짐을 부린 다음 우뚝 솟아 있는 범선 같았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이주하는 새 영혼들을 싣고 죽음의 바다를 건너 삶의 대륙으로 온 범선. 그녀는 그중 이제 막 한 영혼을 상륙시키고 지금은 닻을 내리고 가벼워진 선체로 텅 빈 휴식을 취하며 누워 있었다. 그녀와 함께, 쓰일 때로 쓰여 닳아 버린 삭구와 갑판, 그리고 그녀가 조금 전까지 어디에 있었는지, 어디를 건너와 어떻게 정박했는지에 대한 꺼져버린 기억, 그 망각도 쉬고 있었다.
아무도 그녀가 어느 나라의 깃발 아래 정박했는지 그 지리를 몰랐기 때문에 어떤 언어로 말을 걸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산고를 겪고 몸을 풀고 있는 산모를 이렇게 표현한 작가가 어디에 있을까? 얼마나 오래, 깊이 관찰했으면 이렇게 숭고한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특히 마지막 문장은 산모에 대한 경외가 묻어나는 작가의 진심이 느껴졌다.

 

(202) 아내와의 사이는 좋았지만 단순함이 부족했다. 그녀의 친절함과 배려는 그를 억눌렀고, 또 그는 그녀에 대한 비판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아주 사심 없는 지적도 그녀에게는 뭔가를 숨긴 질책처럼, 가령 그녀는 귀골인데 그는 천골이라거나, 자기 이전에 그녀가 다른 남자의 소유였다거나 하는 질책처럼 들릴까 봐 조심했다. 혹시 자기가 부당하고 모욕적인 헛생각을 한다고 그녀가 의심할지도 모른다고 불안해 하다 보니 그들의 삶은 부자연스러웠다. 그들은 서로를 너무 점잖게 대하려고 애썼고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단순함이 부족하다는 진단. 너무 정확한 듯. 대다수의 갈등은 너무 복잡하게 풀어가려는 마음가짐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부부관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227) 대포에게 다양한 변화를 요구하다니 얼마나 이상한 주장이냐 말이야! 대체 왜 대포 대신에 날이면 날마다 열거와 쉼표와 문구를 쏘아 대는 자기 자신에게 놀라지 않고, 대체 왜 톡톡 뛰는 벼룩처럼 성급한 저널리즘의 인류애를 향한 사격을 중단하지 않는 거냐고? 어떻게 모르는 거지? 대포가 아니라 바로 그가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하고 반복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공책에다 쓸데없는 소리만 잔뜩 써 봐야 아무런 의미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거기에다가 인간이 뭔가 자기 것을, 자유분방한 인간적 천재성의 어떤 부분이나 어떤 동화를 집어넣지 않는 한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왜 모르는 걸까.

 

 전쟁터에서 고르돈과 나누는 대화. 작가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서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고, 또한 신랄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있는 것 같은 대목.

 

(300) 삼 년 동안의 변화, 자기가 모르는 일, 이동, 전쟁, 혁명, 대란, 총격, 파멸의 장면, 죽음의 장면, 파괴된 다리, 파괴, 화재, 이 모든 것이 갑자기 내용물이 빠진 거대하고 텅 빈 장소로 바뀌었다. 오랜 휴지부 이후에 일어난 진정한 첫 사건은 현기증이 나는 이 기차에 몸을 실은 채 집에 가까워진다는 것이었으니, 여전히 이 세상에 고스란히, 엄연히 존재하는 집, 조약돌 하나도 소중한 집이었다. 바로 그것이 삶이요 경험이었고, 바로 그것이 모험을 추구하는 자들의 목적이요 예술이 염두에 둔 것이었다. 가족에게 가는 것, 집으로 귀향하는 것, 존재를 재개하는 것 말이다.

 

 징집되어 전재을 경험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시처럼 아름답고 정확한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존재를 재개한다는 대목. ~

 

(320) 가장 슬픈 것은 그들의 저녁 모임이 시대의 조건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이 시각, 골목길의 맞은편 집에서 이렇게 먹고 마실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창밖에는 어둡고 배고픈 벙어리 모스크바가 있었다. 상점은 텅텅 비고 사냥감이나 보드카 따위는 아예 생각 속에서도 잊힌 상태였다.
요컨대 주위 사람의 삶과 비슷하여 그 안에 흔적도 없이 가라앉는 삶만이 진정한 삶이고, 고립된 행복은 행복이 아니며, 따라서 이 도시에서 유일한 것처럼 보이는 오리와 술은 숫제 술도, 오리도 뭣도 아니었다. 그것이 제일 슬픈 일이었다.

 

 , <닥터 지바고> 중에서 제일 안타까우면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을 뽑으라고 하면 단연코 이 구절을 뽑고 싶다. 특히 고립된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는 이 구절. 당시 러시아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행복마저도 온전히 느끼지 못하는 그 시대를 정확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누구나 힘든 시절에도 넘치는 음식과 술로 다른 세상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지바고와 같은 사람들은 다들 저렇게 이웃들에게 미안해 하며 빵 한 쪽을 먹었을 게다.

 

(332) 진정으로 위대한 일은 모두 우주처럼 시작이 없습니다. 그것은 항상 있어 왔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시초도 없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납니다.

 

 사회주의 혁명을 앞둔 기대와 두근거림도 느껴지지만, 불안함도 함께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405) 대체 왜 내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그 모든 것 때문에 고군분투해야 합니까? 시대는 나를 염두에 두지도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강요하는데요. 나에게도 사실을 무시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죠. 당신은 나의 말이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죠. 하지만 지금 러시아에 현실이라는 것이 있긴 한가요? 내 생각으론, 현실이 너무 겁을 먹어서 몸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시골이 잘 나가고 번창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요. 이것마저 착각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죠? 무엇으로 살아야 하고 또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죠? 나는 살아야 해요, 가정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시대는 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나는 살아야 한다 이 두 구절에서 지바고가 얼마나 처절하게 시대를 건너고 있는지 절절히 느껴졌다.

 

(416) 꼬마 유라가 마당에서, 지금과 마찬가지로 눈이 멀 것 같은 눈으로 피라미드와 큐브, 생크림과 케이크, 요새와 동굴 속 도시를 얼마나 많이 만들었던가! 아, 그때는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얼마나 맛있었던가, 주위의 모든 것이 눈요깃거리이자 맛있는 먹거리가 아니었던가!

 

✎ 우랄로 이동하며 지바고 가족은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는 많은 경험을 한다. 지바고가 눈을 보고 과거를 회상한 장면.

 

(451) 스트렐니코프는 어릴 때부터 가장 높고 밝은 것을 동경했다. 삶을, 성실히 규칙을 준수하고 완벽을 달성하기 위해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거대한 경기장으로 생각했다. 실상은 그렇지 않음이 밝혀졌을 때도 그는 자기가 세계 질서를 단순화시키는 잘못을 범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속으로 모욕을 삭인 그는, 언젠가는 삶과 삶을 왜곡하는 어두운 근원들 사이에서 재판관이 되리라, 삶을 수호하고 삶을 위해 복수하리라, 하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환멸이 그를 잔혹하게 만들었다. 혁명이 그를 무장시켰다.

 

 그 동안 전장에 나가 실종됐던 라라의 남편이 무시무시하게 나타났다. 별명도 무시무시한 라스트렐니코프(학살자, 총살자)’. 결혼 전에는 라라만 바라보는 착한 모범생이었지만, 라라의 고백으로 180도 변해버린 마음에 상처가 많은 사람. 그런 그가 우랄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가는 지바고와 우연히 만나고, 그의 등장으로 1권이 마무리되었다. 한 동안 뜸했던 라라의 소식이 궁금하고, 지바고와는 어떻게 재회할 것인지 정말정말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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