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영웅(미하일 레르몬토프)


그 동안 읽어왔던 러시아 문학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스토리, 주인공이라 색다르고 재미있게 읽었다.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서 아시아적인 향기를 풍기는 러시아 남서부 카프카스(캅카스, 코카서스)산맥의 광대하면서 아름다운 공간적인 배경과,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 주인공 페초린, 그리고 그와 얽힌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여인들(벨라, 타만의 밀수꾼 정부, 베라, 메리), 페초린의 이야기에 대한 서술자가 되어주는 막심 마시므이치와 이름 없는 장교, 엇갈린 시간 구성 등이 무척이나 흥미롭게 빠져든 것 같다.


특히 주인공 페초린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알다가도 모를 것 같고, 도무지 영웅이라는 호칭에 어울리지 않는, 모순적인 주인공! 그리고 그 실체가 죽은 후 남겨진 일기 속 부분적으로 나타나거나, 막심 마시므이치의 기억 속에 일부분만 재생될 뿐인 미스터리한 인물! 멜로드라마 같은 낭만에 질겁하고, 여러 여성들을 사랑하는 척 하다 버리는 것이 취미인 것 같기도 하고, 청개구리같기도 한 위악적인 모습들이 안쓰럽기도 한 캐릭터였다. 민음사 출판사 표지에 나온 미하일 브루벨의 앉아 있는 악마의 우수어린 눈빛을 지녔을 것 같은 페초린! 이름도 어쩌면 이렇게 낯설고 강렬한지! 어쨌든 냉소적이고 허무한 것 같지만, 끊임없이 삶에 대에 고뇌하고 집착하지 않는 모습이 당시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나와 같은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않았을까?

 

 

<1>

-벨라-

31 그럼 누난 당신 거야. 벨라가 당신의 말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우리 마을에는 미녀가 많지. / 검은 눈동자에선 별빛이 타올라. / 그들과의 사랑은 달콤해. 부러운 운명이지. / 그러나 더욱 즐거운 건 용감한 운명. /금으론 네 명의 아내를 살 수 있지만, / 기운찬 말 한 마리는 값을 매길 수도 없네. / 그는 초원의 바람에도 뒤지지 않아. / 배신하지 않고 속이지 않아.

 말을 탐내는 아지마트는 누나를 팔겠다는 말도 안 되는 거래를 제안하지만, 그런 거래를 뒤집는 카즈비치의 말사랑에 대한 뚝심(?)은 더욱 놀라웠다.

 

40 날 믿어. 알라는 어느 인종에게나 같은 분이야. 그러니 그가 내게 당신을 사랑하는 걸 허락했다면, 왜 당신에겐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겠어?

 그 어떤 구애에도 끄떡없던 벨라가 이 말에 석탄처럼 까맣게 두 눈을 빛냈던 장면이다. 정말 페초린이란 남자. 대단하다. 구애에 종교를 끌어들이다니! 페초린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면서도 무섭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 대목에서는 나는 좀 무서웠다.

 

46 공기가 희박해져서 숨 쉬기가 고통스러웠다. 또 매 순간 머리로 피가 쏠렸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떤 즐거운 종류의 느낌이 내 혈관을 따라 퍼져갔으며, 나는 왜 그런지 세상으로부터 아주 높이 올라와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꼈다. 물론 유치한 감정이었지만, 우리는 사회적 인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으로 더 가까이 다가설 때에 그처럼 어린아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이란 과거의 어느 한 때와도 같은 것이 되며, 미래의 어느 날에도 또다시 이러한 모습이 될 것이다.

 이 책 속에서는 그 동안 보아 왔던 도시적인 풍경보다는 거칠고 광대하지만 맑고 시리면서 아름다운 풍광들이 많이 묘사가 되는데, 이 책 속의 편집자이자 1부 서술자라고 할 수 있는 장교(?)와 막심 막시므이치와 등반하는 장면을 옮겨봤다. 산을 오르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산에 오르면 어린아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무척이나 끌렸다.

 

65 그 애는 자신이 그리스도교도가 아닌 것을 슬퍼하면서, 다음 세상에서는 그 애의 영혼이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의 영혼과 만날 수 없을 거라 했어요. 그리고 다른 여자가 천국에서 그의 짝이 될 거라고요. 그 애가 죽기 전에 세례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제가 그렇게 말하자, 그 애는 망설이듯 저를 보더니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그리고 마침내 모태신앙을 가진 그대로 죽겠다고 대답했어요.

 종교적인 의미로 사랑을 허락하더니, 결국은 종교적인 이유로 사후의 인연을 거부한 벨라. 모순되면서도 나름 일관성 있는 사랑의 결말이랄까? 이름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짧은 시간을 살다갔다.

 

-막심 막시므이치-

-페초린 일기의 서문-

86

-다음의 일기를 읽으면서 자신의 연약함과 결점들을 혹독하리만치 파헤쳐 보여 주는 이 사람의 진정성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아무리 악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영혼이 지나온 역사란, 온 나라의 역사만큼이나 흥미롭고도 유익한 것이다.

-이제 이곳 세상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겠지만 그들에게 아직까지도 비난받고 있을 그 사람의 행동이 무죄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해할 수 있을 때 용서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페초린이 카프카스 체류 중에 썼던 글들만을 포함시켰다. 나에겐 아직 그 자신의 전 생애를 이야기한 두꺼운 공책 한 권이 남아 있다.

-아마도 몇몇 독자는 페초린의 성격에 관한 나의 의견을 묻고 싶어 할 것이다. 나의 대답은 이 책의 제목으로 대신하려 한다. “이건 악의를 품은 풍자야!” 그들은 말할 것이다. 나는 모르겠다.

 1부 마지막에 나오는 서술자의 이야기. 어떤 때는 페초린과 동일인물이 아닐지 의심하기도 하고, 마치 모르는 척 하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는 아닌지 미심쩍어 하면서 읽은 부분이다. 이후부터 펼쳐지는 페초린의 모험 혹은 방황이 연약함이나 결점을 그대로 보여주기는 하지만, 과연 용서를 받을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페초린의 행동들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이 서술자가 페초린을 영웅이라 칭하는 이유가 뭘까?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방황하기 때문에? . 어렵다!

 

-타만-

98 그녀의 반듯한 코는 나를 미치게 했다. 나는 독일적인 상상력의 과장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는 괴테의 미뇽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그 둘 사이에는 여러 공통점이 있었다. 몹시 불안해하다가도 재빨리 완전한 부동의 상태로 돌아서곤 하는 것, 수수께끼 같은 악센트, 깡총거림과 기묘한 노래와 같은 모든 것들…….

 이 책에 등장하는 벨라나 이 여성은 이국적이면서도 신비하고 강렬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마치 요정같기도 한 신비로운 느낌. 나중에 등장하는 베라나 공녀 메리도 여성성이 매우 강한 캐릭터인데, 뭔가 좀 신비스러운 느낌으로 등장한다.

 

104 천만다행으로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할 수 있었기에, 나는 타만을 떠났다. 그 노파와 불쌍한 장님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공적인 업무를 보기 위해, 더구나 관용 역마권을 지니고 여행 중인 장교였다. 그런 내가 대체 인간의 기쁨과 슬픔에 관여할 일이 뭐 있었겠는가!

 ‘타만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한 편의 기이한 동화를 읽는 것 같다가 갑자기 밀수꾼들의 다큐가 되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인간의 기쁨과 슬픔에 관여할 일이 뭐 있겠는가!’라는 말이, 허무하면서도 슬프다. 이후에 펼쳐질 일들에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살아갈 것 같은 느낌. 소용돌이 같은 사건 속을 지나가고 있으면서도 한 걸음 물러선 여행자의 시선이랄까? 표지에 앉아있는 악마의 눈빛처럼 처연하고 슬픈 느낌이 강렬하게 몰려왔던 대목이다.

 

<2>(페초린 일기의 종편)

 

-공녀 메리-

115 친구, 나는 여자들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경멸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삶은 너무도 우스운 멜로드라마일 테니까.

 멜로드라마라는 말과 함께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것을 무척이나 혐오하는 페초린

 

117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를 화나게 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나는 선천적으로 반박하기를 매우 좋아한다. 나의 삶 전체는 마음이나 이성에 대항하는 슬프고도 절망적인 반박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열광자 앞에서의 나는 한겨울 서리 같아진다. 또한 내가 만약 둔한 냉담자와 자주 교제한다면 열정적인 몽사가가 될 것이란 생각인 든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당시 내 마음속엔 불쾌하면서도 친숙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그것은 질투심이었다.

 스스로에겐 솔직하지만 타인에게는 위악적인, 청개구리 같은 페초린.

 

155 친구, 나한테도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런데 날 보라고. 나는 먹고, 또 먹고, 편안히 자면서, 질질 짜지 않고 죽을 수 있게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고!

170 나는 매우 기뻤다. 나는 나의 적들을 사랑한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그들은 나를 즐겁게 하며, 내 피를 끓게 한다. 늘 경계하는 것, 모든 시선을 눈치 채는 것, 모든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것, 의도를 간파하는 것, 음모를 방해하는 것, 속은 척하는 것, 그리고 갑자기 한 방에 그 모든 잔꾀와 계획들의 거대하고 정교하는 구조를 뒤엎어 버리는 것, 이 모든 것을 난 삶이라 부른다.

식사 내내 그루슈니츠키는 기병 대장과 속삭이면서 눈짓을 주고 받았다.

 모든 위선적인 것들을 골려주기 위해 위악적이 되는 것! 그것이 페초린의 삶의 목표일까? 낯간지러운 해피엔딩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격정이 있고 반전이 있는 스릴러를 즐기는 하나에 집착하지 않는 바람 같은 페초린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157 열정이란 그 첫 단계에서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마음이 가지는 속성이다. 평생을 이 열정에 흔들릴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다. 수없이 고요한 강물들도 처음에는 거친 폭포로 시작한다. 그 물살도, 또 거품도 바다까지 가진 못한다. 그러나 이 고요함이란 종종 감추어져 있음에도 거대한 힘의 신호다. 꽉 차 있으며 깊이가 있는 감정과 생각에는 광란의 파도가 일 수 없다. 고통이나 기쁨을 경험한 영혼은 모든 것에 스스로 엄격한 잣대를 지니게 되며,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확신하게 된다. 그것은 안다. 폭풍이 없다면 쉼 없이 타오르는 태양도 시들고 말리라는 것을. 그것은 자기 자신의 삶을 꿰뚫어 보기 시작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애무하거나 스스로에게 벌을 내린다. 마치 사랑스러운 어린아이를 다루듯이. 오직 이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게 되었을 때에 이르러서야, 사람은 신의 심판을 존중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페초린은 스스로를 사랑하거나 벌을 내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닌지. 더욱이 숨겨져 있는 일기장 한 권이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186 내가 아무리 한 여자를 뜨겁게 사랑한다 할지라도, 일단 그녀가 자신과 결혼해야 한다는 느낌을 내게 준다면, 사랑과는 작별이다! 내 가슴은 돌로 변해 버리고, 그 무엇도 다시 그것을 덥히지는 못한다. 난 결혼을 제외하면 그 어떤 희생이라도 기꺼이 치를 수 있다. 내 인생, 심지어 내 명예를 걸고 도박이라도 하라면, 스무 번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내 자유만은 팔 수 없다. 왜 나는 그것을 이렇게도 귀중히 여기는 것일까? 내게 그것이 무엇이라고? 나는 뭘 준비하고 있는 걸까? 미래에 뭘 기대하고 있는 걸까? 사실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선천적인 두려움,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다…….

 페초린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바로 자유를 잃는 것이 아니었을까?


*2019. 11. 05.


우리 시대의 영웅
국내도서
저자 :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Michail Lermontov) / 오정미역
출판 : 민음사 2009.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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