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고정욱)
- 상황별 청소년 소설 추천/내면의 문제로 고민할 때
- 2013. 8. 6.
고정욱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엔 아이스하키 이야기로.
생소한 아이스하키 이야기이지만, 작가가 하려는 이야기는 결국 자신을 이겨내고 꿈과 희망을 찾아가는 전작과 다르지 않았다.
구조도 비슷하다. 거칠고 자기 표현은 서투르지만 천성이 강직하고 순수한 주인공, 예쁘고 생각이 바른 여자친구, 책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능동적으로 찾아가는 점, 위기 때 등장하는 조력자(여기서는 새 감독과 김윤아 선수?), 힘든 가정환경 등. 결국 이런 캐릭터와 이야기들이 조합되면서 '재석이' 시리즈와 다르지만 닮은 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만화같은 이야기(특히 주리가 영광이에게 준 고통을 잊게 하는 파스같은)이고, 극적인 자기극복을 통해 통쾌한 반전과 흥미를 이끌어내며 속도감 있고 쉽게 읽히는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묵직한 고민거리를 '툭'하고 던져 놓는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부터 시작되는 운동교육의 문제점(개인과 가정의 과도한 부담과 흥미가 아닌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점), 공부든 운동이든 자신의 의사가 아닌 부모의 의사로부터 출발하는 점, 그로 인한 체벌 등. 각각의 문제들이 서로 엉켜서 대한민국의 어긋난 교육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얼마 전 법륜스님의 강의를 원격연수로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중 인상깊었던 법문이 있었는데, 딸이 어머니가 행복하시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묻는 질문에 스님이 '엄마 생각하지 말고 딸이 행복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영광이도 자신이 꿈을 포기한다고 부모가 다시 재결합할 리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중요한 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의 자신의 행복이다라는 것을 알게 되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고 통쾌했다. 우리 아이들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부모의 못다한 꿈을 이어나가는 인형에서 어서 벗어나기글.
단순하고 만화적인 설정이지만 영광의 선택에서 우리 아이들이 선택과 노력, 희망을 조금이라도 깨달았으면 좋겠다.
<인상 깊은 구절>
(42) 영광은 말머리에 '개'를 붙였다. 그렇게 붙이는 게 아이들의 말버릇이긴 하지만 영광은 유난히 심했다. 그렇게 하면 강조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을 좀 더 강하게 표현하는 다른 방법을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때론 더 강하게 하려고 '캐'를 붙이기도 했다.
(63) 그날, 그 방에서는 아이스하키 팀원들의 엉덩이 때리는 둔탁한 소리가 난무했다. 붕붕 소리를 내며 스틱은 허공에서 춤을 추었고, 꼼짝없이 엉덩이를 맞아야 하는 선수들은 이를 악물고 무릎을 꿇거나 엉덩이를 비틀었다. 무자비한 폭력이 아직도 성장 중인 아이들의 자존감을 무참히 짓밟았다. 어느 정도 체벌이 진행되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거나 잘해야겠다는 각오는 다 사라졌다. 혹독한 고통 속에서 남은 것은 동물적인 증오와 두려움뿐이었다.
(69) 그 어떤 일을 할 때보다 아이스하키를 할 때 영광은 즐겁고 기분이 좋았다. 싫증나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아이스하키밖에 없었다. 행복해지는 비결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광은 좋아하는 아이스하키를 하고 있었다. 아이스하키를 위해 하는 노력 하나하나가 다 기쁘고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91-92) 부모님의 싸움은 계속 이어졌다. 어머니는 학습지 교사답게 수치까지 들어가며 운동을 반대했다. 고등학생 선수가 대학 진학에 성공하는 경우는 7.5퍼센트에 불과하고 대학교 3학년까지 운동을 할 수 있는 건 고작 2.5퍼센트뿐이라는 거였다. 나머지 97.5퍼센트의 선수들은 결국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존재라고 했다.
(122) 부모들은 지금 두 의견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였다. 감독과 코치에게 아이들을 지도하고 이끌 수 있는 권리를 맡긴 것이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고, 운동은 어디까지나 운동이지 때려 가면서까지 하면 안 된다는 의견이 있었다. 한마디로 운동하다 보면 체벌은 받을 수 있다는 부모와, 절대 맞아가면서까지 운동시키지는 않겠다는 부모로 나뉜 것이다.
(127) 수학 선생도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영광은 팔뚝에 다시 고개를 파묻고 마저 잠을 청했다. 그러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아이스하키부라는 말에 다시 자도록 내버려두는 선생님의 처사가 왠지 모르게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36) "때리지 않아도 다 알아서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아냐? 열심히 안 해서 실력이 떨어지면 그거는 자기책임이잖아. 왜 때려? 때린다고 돼?"
"한국은 안 그래. 나도 맞으면 정신이 좀 번쩍 들긴 해. 없던 힘도 좀 나고. 대충 하다가도 열심히 하게 되거든."
"자기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 왜 열심히 안 하고 대충 해?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런 게 있어."
영광은 주리의 말에 논리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주리의 말이 다 맞는데 왠지 우리 정서와는 어긋난 것 같았다.
"한국에서 운동하거나 공부하는 아이들은 대개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 반, 부모가 원해서 하는 것 반이야."
"오 마이 갓!"
(139) "미국에서 자기소개 하라고 하면 취미, 특기, 자기가 원하는 거, 이런 걸 얘기하지. 가족이나 커뮤니티나 국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 안 해."
(140) 아무리 우울하고 괴로워도, 혀끝을 감도는 다양한 맛의 아이스크림은 분명히 마음속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인간은 고독하고, 착하지도 않으며 강하지도 않고, 또 어리석은데다가 비참하기 짝이 없지만, 그런 고독을 이기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된 건 마법과도 같은 단 것의 조화였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하는 걸 하는 것, 영광에게는 그것이 문제였다.
(217) '내가 과연 아이스하키 말고 할 게 있겠어? 아니잖아. 할 줄 아는 게 아이스하키뿐인데. 그럼 이렇게 관두는 게 맞아? 엄마 아빠가 그러면 마음 아파할까? 그렇다고 두 분이 다시 합치시나? 그것도 아니잖아. 나만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아이스하키를 시작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구제받는 유일한 길은 희망을 잃지 않는 거였다. 그리고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했다.
(228) "그때 깨달았어요. 세계 정상급 선수라면 누구나 부상을 안고 있어요. 그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다 부상을 안고 싸워서 종이 한 장 차이로 정상에 올라가는 거예요."
영광은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앗다.
"부상 당한 걸 탓하기보다는 그 부상을 이겨내고 남보다 한발 앞서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운동하다 보면 누구나 힘들어요.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학교 다니기도 힘들고, 집중을 방해하는 일도 많잖아요. 하지만 그런 거 다 이겨내는 사람만이 정상에 올라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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