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바늘꽃(질 페이턴 월시)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역사의 대부분은 전쟁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여 다양한 형태의 전쟁을 배우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지금 우리 삶과 조금 거리만 있을 뿐,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참혹성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중 런던 폭격이 배경이다.

책에 그려진 런던의 모습은 전쟁의 참혹성을 생생하고 세밀하게 증언하고 있다. 폭격으로 아침 식사 모습 그대로 숨진 아주머니, 역시 폭격으로 공습을 알리다 무전기를 든 상태로 죽은 군인의 모습, 서 있는 상태에서 무너져 내린 시멘트에 묻힌 줄리. 이스라엘의 침탈에 무너져 내린 가자지구의 모습과 겹쳐 전쟁의 참혹성이 섬뜩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그 속에도 사람들은 살아 있다. 오히려 극한의 어려움으로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며, 아이들은 보호자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롭기까지 하다. 전쟁은 아이들에게도 어른으로서 삶을 강요할 수밖에 없고, 1인칭 주인공 빌은 그 역할을 잘 해내려 한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었고, 사랑은 언제 어디서든 갑자기 오는 것이고 삶을 흔들만큼 특이한 것이며, 그것이 전쟁이라 하더라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1인칭 주인공 빌은 줄리와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 폭격으로 다친 줄리가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며 빌과 줄리 사이엔 어른들의 질서가 다시 회복되었고, 전쟁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헤어짐이 아픔이 가벼워질 수 있을까.


(74) "나도 번호는 있지만 내 머릿속에 있어"

숱한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내 번호는 애써 생각해 내야 하지만 줄리의 번호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줄리의 번호는 ZKDN/74/8이었다. 줄리는 손에 작은 비행기를 쥔 채 금방 곯아떨어졌다.


(76) 한편으로 정말 이상한 것은, 변하지 않는 게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보같이 들리겠지만, 아무리 히틀러의 폭격기가 하늘을 가득 메워도 나뭇잎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해 보였다. 

(중략) 그러나 온갖 혼란과 숱한 파괴의 한복판에서 모든 사람들의 삶이 뒤바뀌고 우리가 난생처음으로 홀로 서서 살아가는 상황에서는 그토록 당연한 현상들이 마치 온실에서 자란 꽃을 보듯 신비롭고 색다르게 보였다.


(85) 새삼스레 우리도 그런 곳에서 다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까지나 새들처럼 자유롭게 도시를 날아다닐 수 있을 거라고 믿어서는 안 되었다.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알지 못했다. 우리는 그저 세인트제임스 공원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놀고, 마르코 아저씨네 식당 같은 데시 식사를 하고 대피소에서 잠을 자고, 오렌지를 팔고, 깔깔대며 지냈다.


(103) 나는 알던 집들이 원래대로 서 있기를 바랐다. 그곳에 어른들이 있어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해 주기를 바랐다. 누가 나를 걱정해 주면 좋겠고, 내가 돌봐야 하는 사람도 없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웨일스로 돌아가 잔소리를 듣고 싶고 차와 따뜻한 빵을 먹고 싶었다. 나는 안전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아빠가 우리 아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67) 오, 서풍이여, 그대는 언제 불어오려나,

보슬비라도 내려 주었으면,

주여, 내 사랑이 내 품에 있다면,

그리고 내가 다시 잠들 수 있다면.

하지만 줄리는 저기에 있다. 이제 완전히 흙에서 파내어져 팔이 아무렇게나 늘어진 채 이불에 덮여 들것에 실려 가고 있다. 나는 고개를 젖히고 하늘에 대고 개처럼 울부짖었다.


분홍바늘꽃
국내도서
저자 : 질 페이턴 월시,햇살과나무꾼
출판 : 양철북 200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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