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한기욱 엮고 옮김)


여름 방학 동안 한 편씩 야금야금 읽었다.
첫 작품으로 호손의 ‘젊은 굿맨 브라운’을 만난 것이 그렇게 좋은 시작이 아니어서 한동안 묵혀두었다가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한 편 씩 읽어나가는데,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하고 묵직한 작품들을 만나면서 18세기, 19세기의 미국 단편 소설들이 이뤄낸 성취에 대해 감탄할 수밖에 없았다. 대단하고 훌륭한 작품이라 여겨지지만 이 위대한 작품들을 내 짧은 지식으로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미 수천, 수만 편의 논문들이 나와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읽었다는 증거라도 남기기 위해 각 단편들에 대한 짤막한 감상 메모를 남겨 본다. 

 

*젊은 굿맨 브라운(너새니얼 호손)

✎ 너무 몽환적이어서, ‘이게 무슨 의미지?’하고 물음표만 남겼던 작품이다. 단순한 생각으로는 ‘왜 굿맨 브라운이 따라갔지?’, ‘이미 따라가는 것 자체가 종교에 대한 반감이고 탈출 아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종교의 거대한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슬프고 이상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그래서 특별히 인상 깊은 구절을 남기지 못했다.

 

*검은 고양이(에드거 앨런 포우)

✎ 지난 번 모임에서 충분히 이야기했던 것 같다. 역시 명작!


*필경사 바틀비(허먼 멜빌)

✎ 예전부터 문희숙선생님께 들었던 그 단편을 이제야 읽게 되었다. 읽을수록 바틀비의 기이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오히려 변호사의 입장에 감정이입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도 좋은 게 좋거나 어떻게 됐든 일이 굴러가면 되는 거지 라는 그런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어서 그럴 것이다. 터키(칠면조), 니퍼즈(쇠집게?)의 상반된 성격과 업무 스타일, 진저(생강과자)라는 심부름꾼은 마치 이 세상에 있을 법한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인물들, 그보다 이 세상을 초탈한 사람 같은 바틀비의 모습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감옥에서 조용히 죽어간 바틀비의 사연도 슬프고,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세상에,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의 말단 직원이라는 직업도 있었다니! 어쨌든 바틀비는 전직에서 배달불능한 희망을 온 몸으로 체화시키고 말았고, 결국 이제는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나저나 ‘바틀비’는 어떤 의미를 가진 명명일까?

(54) “외람된 말씀이지만, 선생님, 우린 둘 다 늙어가고 있어요.” 이렇게 동류의식에 호소하면 저항하기가 힘들어진다. 
(57) 그들의 발작은 마치 경비병의 근무 교대처럼 서로 교대했다. 니퍼즈의 발작이 시작되면 터키의 발작은 가라앉았고, 그 역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주어진 정황에서는 자연의 훌륭한 배려였다.
(60) 바로 이런 자세로 앉은 채로 그를 부르면서 내가 그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즉 분량이 얼마 안되는 서류를 나와 함께 검토하는 일을-신속하게 말했다. 바틀비가 자신의 구석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 특유의 온화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하고 했을 때 나의 놀라움, 아니 대경식색을 상상해보라.
(65) 수동적 저항만큼 성실한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은 없다. 만약 그런 저항을 당한 사람이 몰인정하지 않은 기질이고 또 저항하는 사람이 수동성의 면에서 전혀 악의가 없다면, 그렇다면 전자는 기분이 좋을 때에는 자신의 판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판명되는 것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관대하게 해석하려고 애쓸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정확히 그런 식으로 나는 바틀비와 그의 습성을 주시했다. 불쌍한 녀석! 하고 나는 생각했다. 
(69) 날이 감에 따라 나는 바틀비와 상당히 화해하게 되었다. 그의 착실함, 전혀 방탕하지 않은 점, 부단한 근면성(그가 칸막이 뒤에서 선 채로 공상에 빠지고 싶어할 때를 제외하고), 깊은 고요함, 어떤 정황에서도 한결같은 태도 등으로 인해 그를 고용한 것은 사무실에 소중한 이득이었다. 가장 중요한 한가지는 이것, 즉 그가 항상 거기에 있다는 것, 아침에 가장 먼저 와 있고 하루종일 자리를 지키며 밤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77) “니퍼즈 씨.” 내가 말했다. “당신은 당분간 물러나 있었으면 싶어.”
어찌된 일인지 최근에 나는 이 ‘싶다’라는 단어를 딱히 적절하지 않은 온갖 경우에도 무실결에 사용하는 습성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바틀비와 접촉함으로써 내가 정신적인 면에서 이미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몸이 떨렸다.
(101) 그 소문은 이렇다. 즉 바틀비가 워싱턴의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의 말단 직원이었는데, 행정부의 물갈이로 갑자기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이 소문을 곰곰이 생각할 때면 나를 사로잡는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다. 배달 불능 편지라니! 죽은 사람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천성적으로 혹은 불운에 의해 창백한 절망에 빠지기 쉬운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런 사람이 계속해서 이 배달 불능 편지를 다루면서 그것들을 분류해서 태우는 것보다 그 창백한 절망을 깊게 하는 데 더 안성맞춤인 일이 있을까? ~ (중략) ~ 삶의 심부름에 나선 이 편지들이 죽음으로 질주한 것이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진품(헨리 제임스)

✎ 이 글을 읽으면서 자신을 진품이라 생각하는 부부의 이야기에 끌끌 혀를 차면서도 또 안쓰럽기도 했다. 딱히 그 부부를 내치지 못해 모델로 쓰면서 자신의 그림까지 망가지는 화가의 모습도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러면서 이번에 읽은 맹자의 구절들과 연결되는 지점들이 있어 옮겨본다.

“(맹자, 마음의 정치학3권 120쪽) 유교의 궁극은 인의충신 같은 결말이 아니라 그 말의 속살을 채우는 실천, 곧 확충과 획득의 과정에 있다. 인의, 충신, 지혜와 용기 등은 좋고도 좋은 말(종자)이긴 하나 그것이 껍데기로, 쭉정이로 말라비틀어진 채 횡행하면서 도리어 해악이 되는 수가 있다. 요체는 호학, 곧 숙성의 과정이다. 어쩌면 유교는 숙성의 과정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요즘 말로 하면 유교는 과정 철학이다!)
(122) “선생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쓰실 일이 있다면 우리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어요. 특히 이 사람이야말로 책에 나오는 귀부인으로 딱이지요.”
(126) 친구들은 그들을 좋아했지만 그들을 부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그들의 옷차림이나 태도, 그들의 유형에는-신용을 나타내는 뭔가가 있었다. 그러나 신용이란 것이 이따금씩 동전소리가 울려퍼지는 커다란 빈 주머니라면, 적어도 동전소리가 들리기는 해야 하는 법이다. 
(149) 그들은 홀 리가 이 나라의 사회체제에서 비판해 마지않는 모든 것을 집약한 축소판이었다. 너무 인습적인데다 온몸에 애나벨 가죽을 휘감고 대화의 흐름을 끊는 감탄사를 연발하는 이런 족속은 화실에 있을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화실이란 보는 법을 배우는 곳인데, 일신의 안락이나 구하는 부부를 통해 뭘 어떻게 볼 수 있단 말인가?


*누런 벽지(샬롯 퍼킨스 길먼)

✎ 왜, 문희숙선생님께서 ‘누런 벽지’, ‘누런 벽지’ 했는지 알겠다. 주인공에게 몰입되어 나도 조금씩 미쳐 가는 느낌? 내 주위에 나보다 더 나를 잘 안다는 사람에게 나를 규정짓고, 가장 좋다고 처방한 방식에 따라 내 삶이 아닌 타인의 시선에 갖힌 채 살아야 한다면 나도 이렇게 되고 말지 않을까? 간혹 벽에 있는 무늬나 얼룩을 보며 동물이나 또는 상상의 그 무엇을 떠올리는데 이젠 간혹 기어다니는 여자들이 떠오를 것 같다. 결국 미쳐버린 주인공의 자신의 정신세계에서나마 자유를 찾은 것 같고, 기절한 남편을 보며 통쾌함을 느낀 나도 비정상일까? 주인공과 비슷한 삶을 살았던 작가는 작중 인물과는 다른 길을 걸어 이렇게 좋은 작품을 남겼으니 다행인 것 같다.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구속하려 한 모든 구속에 대해 아주 잘 표현한 작품이다. 아직도 누런 벽지들이 생생하게 이미지로 남아 있다.

(159) 존은 내과의사이며, 어쩌면-(살아 있는 사람한테라면 물론 이 말을 하지 않겠지만, 이건 말없는 문서이고 내 마음에 큰 위안이 되니까)-어쩌면 그게 내가 빨리 낫지 않는 한가지 이유인지 모른다.
(160) 높은 신분의 내과 의사가, 그것도 자신의 남편이, 친구와 친척들에게 나에게는 단지 일시적인 신경성 우울증-약간의 히스테리 경향-말고는 정말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확실히 말하는데 내가 어찌하겠는가? <중략>
개인적으로, 나는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나는 자극과 변화와 더불아 마음에 맞는 일이야말로 내 건강에 좋다고 믿는다. 하지만 내가 어찌하겠는가?
(164) 벽지를 갈고 난 후엔 육중한 침대들이, 다음엔 창살 댄 창문이, 그다음에는 층계 머리참의 출입문이 문제가 될 거라고 말했다. “이곳이 당신 건강에 좋단 말이오.” 그가 말했다. “그리고 정말이지, 여보, 단지 석 달 빌리는데 집수리를 하고 싶지는 않소.” 
(183~184) 이 거대한 방에 나와서 마음껏 기어다니는 것이 너무 즐거워! (중략)
“무슨 일이야?” 그가 외쳤다. “도대체, 당신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하던 대로 그냥 기어가고 있었으나 어깨 너머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 드디어 나왔어요.” 내가 말했다. “당신과 제인의 반대를 무릅쓰고요. 그리고 내가 벽지 대부분을 벗겨냈으니, 당신이 나를 도로 집어 넣을 수는 없어요!” 그런데 저 남자가 왜 기절해버린 거지? 그는 기절했고, 그것도 벽 옆의 내 길목을 가로질러서 쓰러지는 바람에 나는 매번 그를 기어서 넘어가야만 했어!


*그랜디썬의 위장(찰스 W. 체스넛)

✎ 작품을 읽기 전 해설이나 제목을 보고 뻔히 결말이 예상이 되는데, 생각보다 뻔하지 않고 엄청난 반전을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 전체가 그랜디썬의 큰 그림이었다는 사실! 본인 혼자만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자유를 찾게 한 그랜디썬은 정말 대단하다!! 이 작품이 나왔을 때 흑인들의 생각은 어떠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197) “그렇습죠, 주인님. 제가 저 비참한 자유 검둥이들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고말고요! 누군가가 그들한테 누구에게 속해 있냐고 물으면 그들은 아무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습죠. 누군가가 저한테 누구에게 속해 있다고 물으면 저는 대답하기가 부끄러울 일이 없습죠. 주인님. 암 그렇고 말고요!”
(209) 대령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잃어버렸던 그랜디썬이 남루하고 여행에 더러워지고 지쳐서 허리가 구부러지고 얼굴에는 고난과 궁핍이 역력한 초췌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212) 대령은 이리호 남안의 한 항구에 있는 선창에서 미합중국 연방보안관 한사람과 나란히 서서 사라져가는 자기 재산을 마지막으로 잠깐 보았을 뿐이다. 뱃머리를 캐나다 쪽으로 향한 채 선창에서 급속하게 멀어져가는 작은 증기선의 선미에는 한무리의 낯익은 검은 얼굴들이 서 있었다. 그런데 뒤돌아보는 그들의 표정은 무슨 이집트의 환락가를 동경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대령은 그랜디썬이 그 배의 한 승무원에게 자신을 가리키니까 그 승무원이 자기에게 비웃는 듯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 대령은 어찌할 수 없어 종주먹을 내질렀고, 사건은 이로써 종결되었다.


*소형 보트(스티븐 크레인)

✎ 난파된 소형 보트에서 생존을 위해 애쓰는 모습들이 절절하고 또 가슴 아파야 하는데, 미안하지만 초반에 너무 지루해서 한참 뒤에야 책을 펼칠 정도였다. 다시 자세히 읽어보니 묘사가 참으로 절박하고 절묘하다. 그러면서도 표현 자체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애써 감정을 자제하려 했지만 슬프고 비극적인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 무척이나 좋았다. 다큐지만 드라마같은 몰입이었다.

(238) 지친 노잡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파도가, 얼음장 같은 밤 파도가 보트 안으로 밀어닥쳐 차가운 바닷물이 그들을 다시 흠뻑 적셨다. 그들은 잠시 몸을 뒤척이고 신음소리를 내고는 죽은 듯이 다시 잠들곤 했으며 그러는 동안 배가 뒤흔들릴 때마다 배 안의 바닷물이 그들 주위를 꾸르륵거리며 돌아다녔다.
(248) 바닷물의 차가움은 슬펐고, 심지어 비극적이었다. 이 사실은 어쩐지 자신의 상황에 대한 견해와 뒤섞이고 혼동한 결과 눈물을 흘릴 적절한 이유로까지 여겨졌다. 바닷물은 차가웠다.
(250) 그는 ‘내가 물에 빠져 죽는 걸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게 가능할까? 그게 가능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한 개인은 자신의 죽음을 최후의 자연현상으로 여길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달걀(셔우드 앤더슨)

✎ 작가의 유년시절과 매우 흡사하다고 하는데, 부모님들의 성공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들이 애처러우면서도 우스꽝스럽게 그려져 안타까운 작품이었다. 특히 양계장에 대한 묘사는 부모님이 철저하게 실패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손님들에게 달걀이나 기형적인 닭의 모습으로 관심을 끌려는 아버지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너무도 슬프고 안쓰러웠다. 

(257) 철학자들 대다수는 필시 양계장에서 자라났을 것이다. 닭에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바라다가 지독한 환멸을 느끼는 것이다. 삶의 여정을 막 시작하는 병아리들은 너무나 영리하고 기민해 보이지만 사실 그것들은 너무 끔찍할 정도로 멍청하다. 병아리는 사람과 아주 비슷해서 우리가 인생을 판단할 때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만약 병으로 죽지 않으면 그것들은 자신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풀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차 바퀴 아래로 걸어들어간다.


*겨울 꿈(F. 스콧 피츠제럴드)

✎ 이 작품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그래서 그런지 <위대한 유산>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에밀리에게 장미를(윌리엄 포크너)

✎ 초반의 지루함을 마지막의 충격적인 장면으로 모두 날려 버리는 작품이었다. 풋풋한 사랑 이야기를 생각했는데, 결국 시대의 유물로 남은 한 나약한 여성이 자신의 사랑과 삶을 지키 위해 감행해야 했던 모든 것이 참으로 비극적인 작품이었다. 남부 체제의 몰락에 대한 회환과 애도가 이 책의 큰 주제라고 하는데, 솔직히 그건 잘 모르겠다. 지독한 악취로 인해 몰래 석회가루를 뿌리는 마을 사람들, 미스 에밀 리가 구입한 남자화장품 세트와 이니셜이 새겨진 잠옷, 그리고 폐쇄한 2층 등 이 모든 복선과 장치들이 결말로 향해 가고 있는 것 자체가 참 잘 구성된 단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에밀리 본인이 상징하는 구시대, 옛날, 추억,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낡았다고 비난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들이 참으로 읽고 생각할 것들이 많아 좋았다.

(320~321)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면서 우리는 장바구니를 들고 들락날락거리는 흑인 하인이 머리가 점점 세어가고 등이 굽어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십이월이 될 때마다 우리는 그녀에게 납세고지서를 보냈지만 그것은 일주일 후에 우체국에서 수취인 불명으로 반송되곤 했다. 이따금 우리는 그녀가 아래층 창가에서-그녀는 집의 위층을 폐쇄했음이 분명했다-마치 벽감에 놓인 조각 흉상처럼 앉아 있는 것을 보곤 했는데, 우리를 쳐다보는 건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에밀리는 세대에서 세대로 양도되었다.-소중하고, 피할 수 없고, 무감하며, 차분하며, 외고집인 존재로서.
(322) 그들에게 과거란 모두 점점 작아지는 길이 아니라-다만 좁다란 병목 같은 최근 십년으로 말미암아 그들로부터 절연되어 있을 뿐-겨울의 손길조차 닿지 않는 거대한 초원인 것이다.
(323) 그런 다음 우리는 두 번째 베개에 어리에 눌려 들어간 자국이 있음을 알아보았다. 우리 가운데 하나가 거기서 뭔가를 들어올렸다. 몸을 앞으고 수그리자 어렴풋하고 보이지 않는 메마른 먼지가 코를 톡 쏘는 것을 느끼며 우리는 철회색의 긴 머리카락 하나를 보았다.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