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클베리 핀의 모험(마크 트웨인)

 

오랜만에 600쪽이 넘는 책을 손에 쥐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익히 들어보고 아동용 문고본으로 몇 번이나 읽은 적이 있는 그 허클베리의 이야기였기에 소설의 두께가 만만치 않았지만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책을 읽어 나갔다.

이 소설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인디언 조와 얽힌 동굴의 황금을 얻은 후(<톰 소여의 모험>)에 펼쳐지는 허클베리 핀과 짐의 로드 스토리(무비)? 언뜻 떠오르는 그린북이나 맨 인 블랙’(요건 좀 아닌가?)의 원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혹은 어릴 적 감명 깊게 봤던 드라마 외팔이 범인을 쫓는 도망자시리즈 느낌도 나고.

단순한 여행기는 아니다. 둘 다 각자의 사연을 숨기고, 도망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미시시피 강을 중심으로 펼쳐지기 때문에 뚜렷한 줄거리는 없지만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허클베리 핀은 특유의 거짓말과 넉살로, 노예 짐은 건강한 몸과 생활력,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나이와 인종을 뛰어넘는 감동적인 우정을 보여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들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젊은이들을 사이에 둔 원한 깊은 두 가문의 이야기, 쫓기는 사기꾼들과 오래도록 인연을 맺으며 여기저기에서 사고를 치고 다니는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사기에 의해 잡힌 짐을 탈옥시키기 위해 온갖 엉뚱한 계략들을 펼치는 장난꾸러기 상상가 톰과 허클베리 핀의 이야기들이다.

중반부는 무척이나 지루했고, 또 남부 사투리를 살리고자 애쓴 번역가의 노력에 비해 좀 어색한 짐의 말투를 읽는데 많이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헉과 짐의 우정 어린 여행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또한 당시 미국의 노예제도나 술에 의존도가 높았던 농부들의 삶, 사기꾼들에게 쉽게 속아 넘어가는 마을공동체 등 너무도 미개했던 19세기 미국의 모습에 기가 차기도 했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허클베리 핀과 자애롭게 아이들의 잘못과 장난을 용서해 주는 어른들, 그리고 노예에게 가혹하지 않았던 대다수 사람들의 모습들을 통해 미국이 오래도록 건재할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었다.

 

-인상 깊은 구절-

 

(111) 허긴 그렇당께. 생각해 보면 지금도 난 부자이제. 난 내 몸뚱어리를 소유하고 있는 주인인데, 능히 800달러는 받을 수 있으니께. 그 돈이 지금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구만.

 

✎ 짐이 스스로의 가격을 매겨 놓으면서 또 그 돈이 없음을 한탄함. 꼭 짐이 순진한 노예여서가 아니더라도, 우리 스스로도 가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230) 자유주에 이르러 제일 먼저 할 일은, 일전 한 푼 쓰지 않고 돈을 모을 것이고 충분히 모아지면 왓츤 아줌마가 살고 있는 데서 그리 멀지 않은 농장에 팔려 간 자기 마누라를 다시 사고, 그러고 나서 자기 부부 둘이서 열심히 일을 하여 아들 둘을 되살 것이며, 만일 주인이 팔지 않는다면 노예 폐지론자에게 부탁하여 애들을 훔치게 할 작정이라고 했습니다.

 

✎ 쫓기는 노예 주제에, 참 꿈이 너무 성실하고 눈물겹다. 나중에 정말 자유인이 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짐의 가족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145) 그리고 그 낡아 빠진 사라사 옷을 입고 여자들 사이를 돌아다니지 마라. 여자 흉내가 서툴러 남자를 속일 순 있을지 모르지만. 얘야, 바늘에 실을 꿰려고 할 때에는 실을 움직이지 않고 바늘을 실 쪽으로 갖다 대는 게 아냐. 바늘을 움직이지 않고 실을 바늘 구멍에 갖다 꿰는 거, 그게 바로 여자들이 거의 늘 실을 꿰는 방법이란다. 하지만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 반대로 하거든. 그리고 또 쥐나 뭐에게 물건을 던질 때에는 여자라면 발끝으로 서서 되도록 어색하게 팔을 머리 위로 가져다가 쥐 있는 데서 2미터 떨어진 곳에다 던져 버리는 거야.

 

✎ 하는 행동으로 남녀를 구분하는 것이 신기해서 옮겨봤다. 실을 바늘에 꿰는 것도 그렇지만, 쥐와 같이 혐오스러운 것들에게 뭔가를 던지는 방식 등도 여자와 남자가 다르다는 것은 당시의 편견일까, 아님 행동에 대한 섬세한 관찰로 봐야 할까?

 

(196) 눈을 떠보니 네가 무사히 돌아와 있는 것을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당께. 난 너무나도 고마워서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네 발에다 입을 맞출 정도였단 말이제. 그런데 너는 생각한다는 것이 고작. 어떻게 하면 거짓부렁으로 이 늙은 짐을 곯려 줄까 하는 것뿐이었당께.

 

어리석고 미신에 얽매어 있고 속박된 구속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노예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정이 많고 이 소설에서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 무엇이든 의지하고 싶은 허클베리 핀의 영원한 동반자.

 

(236) 가만 있자 내가 옳은 일을 해서 짐을 남의 손에 넘겨주었다고 하면, 내 마음이 지금보다 더 편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 기분이 좋지 못했을 거야. 아마 지금과 마찬가지 기분이었을 거야. 나는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옳은 일을 하는 데 힘이 들고, 나쁜 짓을 하는 데는 힘이 들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결과가 똑같다면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해 본댔자 소용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여기서 그만 딱 막히고 말았지요. 이 문제에 대해 답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젠 이 일로 마음을 쓰는 일을 아예 그만두고, 이제부터는 그때 그때에 제일 편리한 방법을 택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당시에 노예를 도망시키고, 도망친 노예를 숨겨주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모두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허클베리 핀은 선과 악, 옳고 그름에 사회적 기준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본성, 즉 그때 그때 편리한 방법을 따르기로 한다. 결국 허클베리 핀은 소설의 그 어떤 순간에도 틀린 결정을 하지 않는다. 허클베리 핀이 자신이 너무도 좋아하는 톰보다 더 현명하고 옳은 결정을 한다.

 

(268) 벅이 말했습니다. “원한이란 이런 거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싸우고 그 사람을 죽여 버린단 말이야. 그러면 그 피살된 사람의 형제가 처음 사람을 죽일 게 아냐. 그러자 그 양쪽 형제들이 서로 맞붙어서 서로를 죽인단 말이야. 이번엔 사촌들이 끼어들 게 아니겠어? 마침내 모두가 다 죽게 되면 결국엔 원한은 없어지고 마는 법이야. 하지만 빨리 끝나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이 걸려.”

 

✎ 원한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아닌가? 모두 다 죽어야 사라지는 어리석은 복수의 반복. 결국 이 소설에 나오는 두 집안도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젊은 연인을 중심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고 끝을 보지 못한 채 피의 복수를 이어 간다. 허클베리 핀과 친구처럼 지내는 어린아이의 주검을 보고 끔찍한 이 원한 관계를 벗어나고자 한다.

 

(284) 나는 그 원한 싸움에서 빠져나온 것이 무척이나 기뻤으며, 짐은 짐대로 늪지에서 도망쳐 나온 것을 매우 기뻐했습니다.

 

(289) 뗏목 생활이란 여건 멋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러러보면 온통 별이 사방에서 반짝이는 하늘이 있고, 우리들은 벌렁 드러누워 별들을 쳐다보며 누가 별을 만들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저절로 생긴 것일까 하고 토론을 벌이곤 했지요. 짐은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고, 나는 저절로 생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렇게 많은 별을 만들자면 아마 여간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까요. 짐은 달이 별을 낳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꽤 일리 있는 말처럼 생각되었기에 나는 그 말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개구리가 무섭게 많은 알을 낳는 것을 본 일이 있으므로 물론 달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우리들은 또 길게 꼬리를 끌고 떨어지는 유성도 가끔 보았습니다. 짐은 별들이 곯아서 둥지에서 내던져진 것이라고 했지요.

 

이 소설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 온갖 사건과 모험 속에서 이렇게 멋진 풍경을 여유 있게 바라보는 장면은 이 장면이 유일한 것 같다. 두 사람의 순진한 상상이 귀엽고, 또 생각보다 그럴듯하다.. 개구리가 알을 낳는 것처럼 달이 별을 낳다니! ㅋㅋㅋ

 

(294) 주로 복음 사업을 하지. 복음 사업이라면 어떤 종류라도 말이오. 부흥회를 후원해 주거나 부흥회를 직접 열기도 하구. 야외 예배 모임을 주선하기도 하지. 한 주일 푹 쉬고 싶은 목사가 있으면 대신 설교도 맡아 주기도 하구. 또한 선교 일도 한다네. 수입으로 말하면 선교 일이 어떤 다른 일보다 짭짝하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야만인들이 아주 먼 곳에 살고 있다고 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그 야만인들을 위해 더 많은 현금을 즉석에서 내놓는단 말씀이야. <중략> 한참 시절엔 난 의사 노릇도 꽤 잘했단 말씀이야. 손을 머리에 얹어 안수하는 것이 내 장기지.

 

✎ 앞으로 꽤 활약을 펼칠 왕과 공작의 등장이다. 주로 마을 단위를 상대로 사기를 쳐서 생계를 이어가는 작자들인데 둘은 따로 활동하다 우연히 쫓기다 한 팀이 된다. 그런데 이 자들이 주로 사기 쳐 먹는 종목이 종교활동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요즘에도 주로 종교 특히 선교로 사기 치는 작자들이 줄어들지 않으니. 어쩜 그리 비슷한 양상인지 모르겠다. 그것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도 그렇고.

 

(302) 이 거짓말쟁이들이 왕도 공작도 아니고 그저 천하의 협잡꾼이요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입도 뻥긋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지요. 혼자만 알고 내색을 않는 것, 그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싸움도 일어나지 않고, 귀찮은 일도 생기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이게 현명한 것인지, 착한 것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렇게 눈치 빠른 허클베리 핀의 의도적인 연기로 왕과 공작의 활약이 꽤 길게 펼쳐진다.

 

(317) 왕은 울음을 터뜨렸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따라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설교사를 껴안고 그에게 기대어 다시 울어 댔습니다. 모든 사람들도 서로 껴안고는 <아—아—멘!> 따위 소리를 외쳐 댔지요. 그때 누군가가 “이 사람을 위해 성금을 모금합시다! 이 가난한 영혼을 위해 성금을 모금합시다!”하고 소리쳤습니다.

 

✎ 정말, 이건 뭔가? 집단 히스테리의 한 장면? 이렇게 대중을 속이는 게 쉽다! 이 작자들에게는.

(353) 부인과 애들은 입장을 금함
바로 이거야.” 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 한 줄을 보고도 오지 않는다면, 아칸소주란 알다가도 모를 곳이란 말이야!”

 

✎ 사기꾼 할만하다. 성인 남자들만 즐길 수 있는 곳이란 메시지만으로도 흥행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중들의 심리는 참으로 한심하다.

 

(365) 그 계집앤 아무것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귀머거리, 벙어리였제. 헉, 그것도 찰귀머거리에다 찰벙어리였단 말이제. 그런데도 나는 그 계집애한테 그렇게 무섭게 야단쳤당께.

 

이 소설에서 가장 슬픈 장면. 모두 다 싣지 못해 가장 마지막 문장들만 옮겨 놓았다. <운수 좋은 날>이 떠오르기도 하면서 비극적인 노예 가족의 삶, 그리고 아픈 딸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무작정 화를 내고 뒤늦게 미치도록 미안한 짐의 마음에서 어찌하지도 못하는 부모의 마음을 공감했다.

 

(515) 둘 다 온몸에 타르를 바르고 깃털로 덮여 있어서 도저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왕과 공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마치 한쌍의 커다란 군모의 깃털 장식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을 보자 메스꺼워졌습니다. 이 가엾은 악당들이 불쌍하게 생각되었지요. 아무리 해도 이 두 놈을 더 이상 미워할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보기에도 끔찍한 광경이었지요. 인간이란 다른 인간에 대해 이렇게 잔인할 수 있는 겁니다.

 

✎ 두 사기꾼의 처참한 결말. 허클베리핀의 마지막 시선이 참 인간적이다.

 

(579) 현삼화를 기르고 구금을 쥐에게 들려주고, 뱀이니 거미니 따위를 귀여워하며 기르는 일이며, 더구나 펜이니 문구니 일기니 따위의 일은 지금까지 해 온 어떤 일보다도 죄수가 된 것이 귀찮고 괴로우며 책임이 무겁다고 투덜대는 겁니다. 그러자 톰도 더 이상은 참으려야 참을 수 없게 되어, 짐더러 이 세상의 어떤 죄수도 여태껏 가져보지 못한 명성을 떨치기에 좋은 기회가 얻어걸렸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모처럼의 기회를 헛되이 버리려 한다고 닦달했지요. 그래서 짐도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앞으로는 다시는 그런 불평을 늘어놓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솔직히 톰의 탈출 계획은 지루하고 말도 안 되는 망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데 불평불만 가득하지만 쥐나 뱀에 둘러싸여 힘든 탈옥 준비를 하는 짐도 그렇고 책에서 읽어 잔뜩 부풀어 오른 멋진 계획으로 자신만만한 톰이나 이 대목에서 모두 이해되고, 심지어 웃음까지 나왔다. 탈옥을 준비하는 부분에서 톰에게 많이 실망했지만, 역시 애들은 애들이다.

 

(614) 아줌마는 우리들을 용서해 주시겠다 하시면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어차피 이제 괜찮다, 또 사내애들이란 으레 그런 거다, 아줌마가 알고 있는 한 사내애들이란 하나같이 짓궂은 짓을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무슨 피해가 없는 이상 이젠 다 끝난 일로 애태우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들이 몸 성히 살아서 아줌마하고 같이 있다는 사실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을 면면히 따져보면 특히 허클베리 핀이나 톰 소여를 돌보는 어른들은 둘의 잔꾀에 혼이 나갈 정도로 피해를 보면서도 모두 용서하고, 사랑으로 다시 감싸준다. 물건도 없어지고, 온갖 협박에 정신적인 피폐함까지 찾아왔으면서도 모든 것을 용서해 주는 샐리 아주머니의 태도에 감동했다. 이외에도 노예제도가 아직 시행되고 있지만, 노예에 대해 인간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백인들이 많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637) 강을 따라 떠내려온 통나무집을 기억하고 있제? 그 안에 무엇에 덮힌 사람 하나가 있었는데, 내가 안으로 들어가서 덮여 있는 걸 들춰 보고는 너를 그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안 하덩가? 그러니까 말인데, 그 돈 필요할 때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어. 왜냐면 죽은 시체는 바로 네 아빠였으니까 말이제.

 

, 정말 엄청난 반전! 그리고 여기에 옮기지 않았지만 이미 짐이 자유의 몸이 되어 있었다는 것도. 600쪽이 넘는 긴 이야기가 뭐랄까, 허무하기도 하면서 여태까지의 모든 지루함이 다 사라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 묘한 결말이었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역시 해피엔딩이 제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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