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차기(이상권)

문화체육관광부는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우수교양도서로 지정했을까?  

 

대통령의 정치적 양자 격인 사람이 장관으로 있는 부서에서 이 책을 '우수교양도서'로 지정한 이유가 무엇일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에 가까운 대통령의 소신이 반영된 것인지, 책을 읽고 나타날 반응이 그들의 의도 대로 진행되리라 믿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작가는 자연과 생태에 관심이 많다.
<난 할 거다>에서도 난독증에 걸릴 정도로 입시에 억압 받았던 서술자가 마음을 풀게 되는 것 중에 하나가 시골 고향의 자연 환경이었으며, <애벌레를 위하여>에서는 애벌레를 중심으로한 약육강식의 세상이지만 자연의 법칙에 합당한, 인위적이지 않는 가장 자연적인 것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이 책 <발차기>에도 친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낙태에 대한 기억과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날 뻔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생명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의 생명에 대한 의지와 관찰력, 공감력으로 보면, 태아의 발차기가 크고 거세게 들릴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또 경희 자신에게만 느껴지는 생명체의 꿈틀거림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아무도 축복해 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있는 태아 '사계'의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주변의 반응이 부정적일 수록 경희는 생명의 소중함에 더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고민이다.
낳아야 하나, 낳지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지만, 현실적인 문제이기에 고민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이 책은 함께 고민해 볼 여지가 많이 있다.
비슷한 상황을 담고 있지만, 애기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언급 없이 절망적인 선택을 하는 <쥐를 잡자>보다는 긍정적이고, 임신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꺼낼 수 없는 <키싱 마이 라이프>보다 좋은 조건에 있다. 물론 <마름모꼴 내 인생>처럼 선택에 대한 상황이 더 좋은 것은 아니다.

결국 생명이 걸린 일이기에 임신 과정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경희는 자존감이 가장 떨어져 있을 때에 임신 했고, 임신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자존감을 되찾는다.
배 속 아이의 태동처럼, 세상을 향한 발차기가 시작된 것인데 책을 덮고 가슴이 답답한 것을 어쩔 수 없다.

(63) 학교를 보자 경희는 숨이 막힌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모두 11년 동안 학교생활을 하였으니까, 학교야말로 그녀에게는 가장 편안한 곳이어야 한다. 선생님들은 물론 친구들이야말로 그녀의 삶에 있어서 바람이나 햇살 같은 존재여야 한다. 그런 생각만 하면 더 외롭다. 누군가에게 길을 묻고 싶어서 그동안 스쳐 간 선생님들을 떠올려 본다. 텅 비어 있다. 아무도 없다. 친구들이야 몇몇 있지만 그들이 사계에 대한 비밀을 감당해 줄지 그게 자신이 없어서, 아무에게도 가슴을 열지 못했다.

 

(97) "얘야, 우리 냉정해지자. 너한테만 처음으로 말한다만, 나도 낙태 경험 있단다. 언제라고는 말하기 힘들어. 이건 너하고 나하고 여자로서 비밀이야. 나도 경험이 있어서 네 남친의 엄마가 아니라 같은 여자로서 말하는 거야. 별거 아니야. 과정이야. 커 가는 과정, 이런 것도 다 커 가는 과정인데, 그 과정을 과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까 신문에 나온 그 학생 꼴이 되는 거야. 나도 너만 한 시기가 있었어. 물론 주위에 임신한 친구도 있었지. 그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심각하지만 돌아보고 나면 우스워. 그럴 수도 있어. 다만 현실을 인정하고 과정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해. 그래야 너도 당당해져. 장난이나 탈선이 아닌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쉽게 생각하자. 연습 문제 푼다고...."

 

(107) "그래, 엄마도 두 번이나."

경희는 눈을 크게 뜬다. 놀랍다. 엄마가 두 번이나 낙태를 했다니. 경희는 다그치고 싶은 마음을 꼭 누른다.

"너 낳고 나서. 한 번은 배 속 아이가 아파서 그랬고, 또 한 번은.... 그래, 그걸 후회한다만 둘을 낳아서 키울 자신이 없었어."

경희는 엄마의 말이 거짓이기를 바랐다. 충격적이다. 엄마도 낙태를 연습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연습이라면 경희를 낳기 전에 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엄마는 경희라는 아기를 낳아 놓고 연달아 두 번이나 연습을 했다. 더 잘 낳기 위해서, 더 건강한 아기를 낳기 위해서, 아님 더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150) 경희는 사계하고는 상관없이 정수하고 분명하게 매듭을 지어야 할 일이 있다고 입술을 깨물어 본다. 정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하여도 경희는 얼굴 못지 않게 야무진 구석이 많았다. 학교 선생님들 앞에서도 바른말 하기로 유명했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부당하게 대하면 경희는 참지 않았다. 알밤처럼 야무지면서도 모가 나지 않는 말, 당돌해 보여도 예의를 거스르지 않는 말로 선생님들에게 대항해왔다. 남자들은 그런 경희를 좋아했다. 애써 예쁜 척하는 다른 여자들하고는 달랐다. 경희는 공주병에 걸린 여자들을 가장 싫어했다. 조금만 얼굴이 예쁘면, 더 예쁘게 보여서 호감을 얻으려고 하는 대한민국의 여자 연예인들을 비아냥거렸다. 그랬던 경희가 정수를 만난 뒤부터 달라졌다. 어떻게 해서든 예뻐 보이려고 하였고, 당당하고 야무진 눈빛도 사라져 버렸다.

발차기
국내도서
저자 : 이상권
출판 : 시공사(단행본) 200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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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어 읽기>

1. 이상권, 난 할 거다  ☞ http://danpung.tistory.com/81
2. 이상권, 애벌레를 위하여  ☞ http://danpung.tistory.com/363
3. 임태희, 쥐를 잡자  ☞ http://danpung.tistory.com/189
4. 이옥수, 키싱 마이 라이프  ☞ http://danpung.tistory.com/188
5. 베리언 존슨, 마름모꼴 내 인생  ☞ http://danpung.tistory.com/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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