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혁신리더 유성룡(이덕일, 역사의아침)
- 행복한 책읽기/인문사회
- 2013. 4. 22.
<징비록>부터 읽었어야 했다. 판단 착오로 이덕일의 책을 먼저 읽어버렸다. ‘선조실록’, ‘선수실록’ , 각종 문집, 편지 등 다양한 자료를 동원해 해석한 이덕일의 달변에 푹 빠져 버렸다. 그렇게 이덕일의 시선으로 임진왜란의 전말과 유성룡의 생애를 돌아보니, 편견 아닌 편견에 빠졌다.
후에 서해문집의 <징비록>을 읽고, 다시 정리하기 위해 김영사의 만화 <징비록>을 읽으니 이해는 잘 되었지만, 이덕일의 책만큼 흥미진진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전천후로 위기의 순간을 헤쳐나간 유성룡의 매력과 인간적인 면에 반해 버렸다. 아래 인상 깊은 구절들을 정리하는 것을 통해 유성룡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그리고 어서 빨리 ‘병산서원’에 가보고 싶다. 오는 5월 18일, 안동 문학기행이 기대가 된다.
<인상 깊은 구절>
5 조선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서애 유성룡의 인생을 되돌아봐야 한다. 그간 외면해왔던 그의 개혁정책을 되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간 외면해왔던 그의 개혁정책을 되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천거한 이순신이 밖에서 쳐들어온 일본군과 싸웠다면 유성룡은 영의정 겸 도체찰사 자격으로 조선을 죽음 직전까지 이르게 한 내부의 병들과 싸웠다.
⇒유성룡과 이순신의 역할의 핵심을 정리한 것 같다.
67 김성일의 <해사록> 뿐만 아니라 <국조보감> 같은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사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인물은 김성이리다. 그러나 그는 사신 과정은 적절히 수행했으나 가장 중요한 결과 보고에서 실수하면서 두고두고 구설수에 휘말린다. 이미 기술한 대로 황윤길은 ‘병화가 있을 것 같다’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그렇지 않다’고 상반되게 보고한 것이다. <국조보감>에는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해서 김성일이 이렇게 말했다고 적혀 있다.
황윤길이 일본인들의 무인기질에 겁먹었다면 유신(儒臣) 김성일은 학문적 우월감으로 일본인들의 무인기질을 우습게 본 것이다. 즉 명나라라를 공격하겠다는 공언을 허풍으로 본 것이다. 김성일은 사신에 대한 예우 등 국가의 체통과 관련한 문제에는 잘 대처했으나 결과보고에서 <국조보감>이 간파한 대로 개인적 감정을 앞세움으로써 훗날 임진왜란 발발의 모든 책임익 그에게 있는 것처럼 공격당한 것이다.
⇒김성일과 황윤길의 통신사로서의 결과보고가 상반되었다는 것은 그 동안 역사공부를 할 때마다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인데,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어 무척 새로웠다. 그리고 아무리 과정이 좋다해도 사안 자체를 바라보는 통찰력과 개인감정을 앞서는 판단력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86~87 유성룡은 이순신을 계속 정읍 현감으로 놔둘 수 없었다. 빨리 군문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전운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선조 24년(1591) 2월 이순신은 진도 군수로 승진했다가 곧바로 종3품 가리포(전남 완도) 첨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다시 전라좌수사로 승진했다. 전라 좌수사는 정3품 당상관이다. 그야말로 눈부신 승진이니 대간에서 논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 무렵 이순신에게 제수된 벼슬들을 보면 유성룡의 의중을 잘 알 수 있다. 진주부사난 가리포 첨사 그리고 여수에 수영이 있던 전라 좌수사는 모두 일본이 침략할 경우 최전선 지역이다. 이곳들이 무너지면 곡창지대 호남이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불우한 무인 이순신은 임진왜란 한 해 전에 ‘전라 좌수사’가 되었다. 이순신을 빈우로 대한 유성룡이 있었기에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일본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좌우의 여론을 무시하고 이순신을 요직에 둘 수 있었던 것은 유성룡의 사람을 보는 안목, 혜안과 결단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란을 대비한 ‘신의 한 수’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96~97 십만양병설이 김장생의 창작에 송시열이 덧붙인 것이라는 중요한 증거가 두 사람이 각각 쓴 <율곡행장>과 <율곡연보>에 있다. 다름 아닌 유성룡이 임란이 발생한 후 다른 사람에게, “이제 와서 보니 이문성은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말했다는 대목이다. 서애 유성룡은 선조 40년(1607)에 사망했다. 그런데 율곡 이이에게 문성이란 시호가 내린 때는 유성룡이 사망한 지 17년 후인 인조 2년(1624)이다.
유성룡은 자신이 죽은 지 17년 후에 이이에게 문성이란 시호가 내릴 것을 알고 “이제 와서 보니 이 문성은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말했다는 격이다. 율곡이 예언가가 아니라 유성룡이 예언가가 되는 셈이다. 김장생이 나중에 썼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볼 수도 있겠지만 김장생이 <율곡행장>을 쓴 것은 선조 30년(1597)으로 율곡이 문성이란 시호를 받기 27년 전이다. 김장생의 창작에 송시열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가필에 가필을 거듭하면서 ‘십만양병설’이란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인터넷에서 이이에 대한 자료를 찾으면 ‘십만양병설’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이의 ‘시무육조’와 함께 말이다. 이덕일의 해석이 그럴 듯한데, 반박에 대해 실리지 않은 것은 왜일까? 몇몇 카페에서는 광해군 때 쓰인 ‘선조실록’과 인조 때 다시 수정된 ‘선수실록’의 작성자들을 비교하면서 북인과 서인들의 이이에 대한 태도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이이는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국방의 중요성을 지적했다고 한다. 이점은 이덕일도 인정한다. 그렇다면 정말 ‘십만양병설’은 이이가 주장했던 것이 맞을까, 아니면 김장생, 송시열을 비롯한 후대 서인들의 상상력에 의한 조작일까?
100 유성룡이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반대해서 임란의 참화를 초래했다는 이야기는 김장생의 창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김장생이 만든 말은 이것뿐이 아니다. 김장생은 ‘기축옥사’ 때 유성룡이 위관이 되어 이발의 팔십 노모와 어린 아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만들었다. 김장생은 정철의 행장인 <송강행록>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 기축옥사 때 유성룡이 정철의 뒤를 이어 위관이 되어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을 유성룡이 죽였다는 주장이다. 김장생은 이 글에서 유성룡과 정철의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 두 사람의 대화를 인용해 사실인 것처럼 만드는 게 김장생의 특기다.
⇒김장생의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당시 엄청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이의 제자이자 송시열의 스승으로서 조선중기 성리학의 주요 흐름을 예학으로 바꾸고, 서인의 영수로서 지금까지도 문묘에 배향되어 추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거목이 정치적 편향성과 개인감정으로 역사적인 사실까지도 바꾸려 하다니. 역사적 인물들을 면면이 뜯어볼수록 참 복잡하고, 실망스럽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105 제승방략은 유사시 각지의 수령이 관할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멀리 배정된 방어지역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전쟁이 발생하면 각 지방관은 평소에 배정된 지역까지 군사를 이끌고 가서 중앙에서 온 경장의 지휘를 받는 체제다. 제승방략은 명종 10년(1555)의 을묘왜란 때 임시적으로 실시한 것이 제도로 굳어졌는데, 한 번 무너지면 더 이상 대책이 없다는 치명적 결점이 있다. 중앙에서 내려온 경장(도원수)이 한 번 패배하면 그것으로 끝장나는 것이다.
또한 진관체제는 기본적으로 내 고장을 내가 지키자는 개념이다. 그러나 제승방략은 남의 고장을 지키러 고향을 버리고 출동하자는 개념이다.
⇒<징비록>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개념 ‘제승방략’과 ‘진관’이다.
111 조선 개국 200년인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일본군이 대거 침략해 왔으나 조선은 전면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종 때의 삼포왜란이나 명종 때의 을묘왜란처럼 국지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수많은 판단착오의 일부분일 뿐!
113 이일이 서울에 있는 날샌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가려고 병조에서 군사를 뽑은 문서를 가져와 보니, 모두 여염이나 시정의 백도들이며 서리와 유생이 반수나 되었다. 임시로 점검하니 유생들은 관복을 갖추고 시권을 들고 있었고, 서리들은 평정건을 써서 군사로 뽑히는 것을 모면하려는 사람들만 뜰에 가득했고, 보낼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일이 명령을 받은 지 3일이 되도록 떠나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하는 수 없이 이일을 먼저 가게 하고 별장 유옥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뒤따라가도록 하였다. <징비록>
⇒코미디가 따로 없다. 절망스럽기도 하고. 지금도 전쟁이 일어나면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듯.
116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좋아하는’ 신립이 상방검까지 하사받았으니 군관들이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신립이 임금께 하직하고 대신들의 회의장소인 빈청으로 와서 대신들에게 인사하고 막 섬돌을 내려설 무렵 사모가 갑자기 떨어졌다. 불길한 징조이기에 대신들의 얼굴빛이 변했다. 게다가 신립은 용안에 도착해 선조에게 글을 올리면서 자신의 이름도 쓰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신립의 마음이 산란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123 임진왜란 초기의 최대 수수께끼 중 하나가 신립이 왜 천험의 조령을 포기하고 탄금대를 결전의 장소로 삼았는가 하는 것이다. 상촌 신흠은 「여러 장사들이 왜란 초에 무너져 패한 기록」에서 신립이 조령을 지키자는 이일과 김여물 등의 의견에 대해,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로 짓밟아버리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신립은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 싸우는 소극적 전법보다 적을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로 승부를 짓는 적극 전법을 택했다. 신립은 조선군의 기병이 왜군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신립에 대해서는 탄금대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다 전사한 충의와 불운의 장수로 알고 있었는데, 갖가지 일화를 통해 실망한 사람 중의 대표격이다.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려 하고, 오로지 자신감만으로 전쟁에 임한. 그나마 끝까지 싸우다 비장하게 죽었으니 지금까지 이름이 남아있을 것이다.
126 충주에서 패전보고가 올라오자 가장 당황한 인물은 선조였다. 그는 패전보고가 이르자마자 파천을 떠올렸다. 정상적인 국왕이라면 전시 비상내각을 꾸려 도성수호를 결의하고 전국에 선전교서를 보내 항전을 독려해야 했지만 선조는 달랐다. <선조실록> 25년 4월 28일조는 “충주에서 패전보고가 이르자 상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케 하고 비로소 파천에 대한 말을 발의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때 “대신 이하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부당함을 극언하였다.”고 전한다.
127 <선수실록>은 선조가 “가지 않고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칠 것이다.”라고 말을 바꾸자 이기 등이 물러갔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박동량이 쓴 <기재사초>는 “궁중에서는 몰래 짐을 꾸리면서 외부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선조는 ‘도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전교를 내려 안심시킨 후에 몰래 파천을 준비한 것이다.
⇒‘정상적인 국왕이라면’ 이 표현이 무척 재미있었다. 그리고 만약 한반도에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면 현재 대통령은 어떤 행보를 보일지 자못 궁금해졌다.
191 미국의 사학자 헐버트는 한국의 4대 발명품으로 금속활자, 거북선, 한글, 적교를 꼽았는데, 적교가 바로 유성룡이 만든 부교다.
부교를 통해 명나라 군사를 남하시키는 데 성공한 유성룡은 이여송에게 빨리 진격하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여송의 생각은 달랐다. 이여송은 임진강에 다리를 놓으라고 재촉했지만 실제로 만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다리가 없어 강을 건널 수 없다는 핑계로 남하가 늦어진 책임을 조선에 떠넘기기 위한 것이었다.
⇒언제나 과제를 내놓으면 바로 해결하는 유성룡. 다리뿐만 아니라 명나라가 요청하는 군량미 등을 해결하니, 도망가고 싶은 명나라 장수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통쾌하면서도 결국은 결정적인 전력은 명나라에 의지해야 하는 조선의 운명에 씁쓸하기도 했다.
224-225 선조 26년(1593) 10월 설치된 훈련도감의 제조는 유성룡, 유사당상은 이덕형, 대장은 조경이다. 유성룡이 훈련도감 제조까지 맡게 된 것은 훈련도감에 대한 구상부터 설치까지, 대강의 방안부터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 유성룡은 조선은 조선인이 지키는 자주국방체제를 이룩하기 위한 근본대책으로 훈련도감 창설을 고안한 것이다. 싸우지 않고 식량만 축내는 명군에 대한 근본대책도 훈련도감을 통한 조선의 군사력 강화밖에 없었다. 명군을 선용하는 길은 그들을 훈련교관으로 사용하자는 것뿐이었다.
⇒일을 처리할 때 일석이조, 일석삼조의 효과를 생각하는 유성룡.
251~252 김수는 비밀국서 전달에 성공했다. 그러나 사신이 공식국서의 내용과 다른 내용을 전하면서 공식국서를 제쳐두고 사신의 주장을 채택할 수 없었다. 명나라 신종은 병부에서 의논해 처리하라고 말했다. 곧 송응창과 이여송 그리고 그 앞잡이 심유경이 조정을 속인 정상들이 드러났다. 심유경은 명 조정에 풍신수길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고했고, 송응창과 이여송은 일본군이 조선에서 모두 물러갔다고 덧붙인 것이다.
~드디어 송응창과 이여송은 소환되고 계요총독 고양겸이 새 경략이 되었다. <선수실록>은 “경략 송응창이 탄핵을 입고 원적지로 돌아갔다. 병부시랑 고양겸이 그를 대신하였는데, 그는 요동에 이르러서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사람을 차견하여 왕래시키기만 하였다”라고 전한다. 송응창보다는 낫지만 그 역시 적극적으로 일본군을 몰아낼 의지가 없었다. 결국 일본을 모아내고 조선을 재건하는 일은 조선이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앞자리에 유성룡이 있었다.
⇒명나라가 조선의 전쟁에 참전해서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전란의 후기에는 조정을 분열시키고 일본과 거짓화해를 하면서 궁극적인 전쟁의 마무리를 하지 않았다. 선조을 폐위시키고 광해군을 세우려는 음모와 송응창의 거짓 국서, 그리고 조선의 비밀국서 전달 과정은 읽는 것만으로 스릴 만점이었다.
271 <자치통감> ‘당기’에 따르면 장순과 허원은 강회의 요충지인 수양성을 지킬 때 양식이 떨어지자 다지를 먹다가, 이것이 떨어지자 군마를 잡아먹고, 이것도 없어지자 새와 쥐를 잡아먹었다. 그마저 떨어지자 장순은 애첩을 죽이고, 허원은 노복을 죽여서 군사를 먹이고, 그 후에는 성안의 부인과 노약자를 찾아내 군사를 먹였다는 기사다. 유성룡은 자신의 애첩과 노복을 죽여서 군사를 먹인 당나라 지배층과 노복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반발하는 조선의 지배층 중 누가 올바른지 물은 것이다.
⇒전란을 계기로 신분제의 개혁과 군사체제의 변혁을 가져오려던 유성룡의 진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런데 수많은 역사책들 중에서 어떻게 이런 적절한 예시를 가져올 수 있는지 참 놀랍기만 하다.
349~350 이순신을 과음하게 하고 잠 못 이루게 한 선조의 유지는 수군을 철폐하니 이순신을 육군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이순신은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라는 장계를 작성한다.
“임진년으로부터 5, 6년간 적이 감히 호남과 충청에 돌입하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적의 진격로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사력을 다해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만일 수군을 전폐시킨다면 이것이야말로 적에게는 다행한 일로 호남과 충청 연해를 거쳐 한강까지 도달할 것이니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설령 전선 수가 적다해도 미신(微臣)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모멸하지는 못 할 것입니다.” (행록)
통제사 이순신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으며’, ‘미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 반대하는데 수군을 폐지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없어질 수군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일본군 부산 본영의 선박만 600여 척이었다. 12척의 배로는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순신을 죽이려는 선조 쪽이나 반대파 쪽에서는 이순신이 전투 도중 전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디를 봐도 완벽했었다는 기록밖에 없는 이순신이 과음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장면이다. 그리고 ‘신에게는 아직도’가 이렇게 감동적인 대목인지 다시 한 번 느낀 대목이었다.
376 이 차자를 본 선조의 대답은 심상했다. “사직하지 말라”고 했을 뿐 유성룡을 위로하거나 탄핵한 인물에 관한 비판은 없었다. 이는 선조의 마음이 유성룡에게 멀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385 양반 사대부들은 유성룡이 속오법, 작비법(대동법), 서예 면천․등용법 등으로 신분적 기득권을 흔든 데 불만을 갖고 있다가 선조의 마음이 그에게 멀어진 틈을 타서 대공세에 나선 것인데, 여기에 앞장선 세력이 북인들이다. 이들이 유성룡이 등용한 노비 출신 신충원을 공격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징비록>이나 <유성룡>을 읽을 때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인물 중 최고가 단연 선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임란 전부터 임란을 극복하는 과정이나, 그 후 모두가 다 마음에 안 든다. 우유부단, 무능, 시기와 질투, 겁쟁이! 광해군이 왕이 된 후에도 자신의 위치를 불안하게 여겨 폭정을 하게 한 것도 역시 다 선조 탓인 듯하다. 정말 왕으로서 자질 부족이다. 꼭 누구처럼.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 역사는 그렇게 반복되는 것인가?
392 선조가 유성룡을 파직시킨 날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묘한 일치이자 묘한 운명이다. 이순신은 죽음으로 7년 전쟁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순신은 전사했으나 조선 수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선조는 이를 믿고 싶지 않았다.
좌의정 이덕형이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왜선 2백여 척이 부서져 죽고 부상당한 수가 수천여 명입니다”라고 보고하자 선조의 반응은 냉담했다.
⇒<선조실록>에 실려 있는 이덕형과 선조의 대화를 이덕일만의 특유의 냉소로 선조를 비난한다. 그의 눈으로 바라보니 더욱 찌질해 보인다.
402 ‘가장 싫은 것은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지나가면서, 나의 조용한 심경을 부딪쳐 와서 헐어버리는 일이다. 매양 이웃에서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이 찾아와 무엇을 물으면 마지못해 대답은 하지만 마음이 매우 즐겁지 않다. 이런 일이 마음에 쌓인 지가 오래되어 나쁜 버릇이 생겨서 남의 발소리만 듣게 되어도 곧바로 가슴이 두근거리며 두려워하게 되었다.’(잡저, ‘두문불출’)
⇒전체적으로 흥미진진하게 읽은 책인데, 그 중에서 가장 가슴 아프면서도 공감이 되는 대목이었다. 하회동으로 돌아와 선조가 다시 불러도 돌아가지 않고, 호성공신으로 책봉이 되건(2등 공신이 도대체 뭐냐?, 원균도 1등 공신으로 올리면서), 봉조(종이품의 관리로 사임한 사람에게 특별히 주던 벼슬)하의 녹을 내리건 선조가 내리는 것은 무조건 사양한 유성룡. 얼마나 상처가 깊었을까? 이 책을 다 읽을 즈음이 3월 말이었는데, 나도 그 즈음 일로 인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던 시기라 유성룡의 그런 행동들이 가슴 미어지도록 공감이 되고, 눈물도 나왔다.
407 이듬해 2월 선조 이연도 세상을 떠났다. 저승에서 선조는 서애의 낯을 볼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시대가 끝이 났다.
⇒어디 볼 낯이 없는 사람이 한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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