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1
- 행복한 책읽기/인문사회
- 2012. 11. 21.
고대의 역사를 따라가는 것은 무척이나 가슴 뛰는 일인 것 같다. 근세나 현대사보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기록분량 만큼이나 행간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상상하는 품이 더 들지만, 그만큼 신나는 그 무엇이 있다.
솔직히 <삼국사기>가 이렇게 쉽게 읽힐 줄 몰랐다. 어떻게 400쪽이 넘는 양장본을 다 읽을까 고민했으나,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장수미 선생님의 말에 이끌려 첫 장을 넘기기 시작해 1주일 동안 집에 와서 틈틈이 읽으니 벌써 마지막 장이다.
국사책에서 익히 봐왔던 유명한 일화들 말고, 신라라는 나라에는 참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가장 눈에 띈 것은 각종 자연재해였다. 메뚜기떼, 전염병, 흙비, 오로라, 기상이변(가을이나 겨울에 봄꽃이 피는 등), 가뭄, 홍수, 태풍, 혜성, 일식, 나무가 부러지는 현상, 호랑이의 침범, 그리고 거의 매년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지진까지.(도대체 월성원자력 발전소는 정말 안전한가?) 고구려나 백제 본기를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고구려 10권, 백제 6권에 비해 월등히 많은 신라 12권에는 경주김씨의 혈통을 이어받은 김부식의 자존심보다는 ‘소박한’ 신라의 역사가 면면이 새겨져 있었다.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을 예측하여 통치의 기본으로 삼았던 고대 왕권의 생리를 나름 이해하고 있지만, 매우 디테일한 기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록은 권력이고 의지인데, 종이가 귀했던 시절을 감안하면 김부식의 상당한 배려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자연재해, 기상이변이 당시에는 그리고 김부식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또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한 무열왕과 문무왕대에 이르러서는 솔직히 눈물겹기까지 했다. 신채호 선생님이 비판한 것처럼 절름발이 통일이었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통일하고, 당나라와 밀당(전쟁까지 불사한, 그러면서도 그 이후로도 당나라와 닭살스러운 외교관계를 지속한)을 거듭하며 나름 주체적인 통일을 이루기까지 엄청난 노력이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몇 줄의 기록이지만 삼국통일을 위한 노력에는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호화로운 왕릉이 아닌 화장과 수중릉을 지시한 문무왕의 임종은 눈물이 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물론 김부식의 각별한 손길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외에도 알영을 박혁거세만큼이나 신격화한 것, 여왕을 세 명이나 배출한 것은 신라만이 가진 매력적인 역사적 사실이다. 정출헌 선생님의 <김부식과 일연은 왜>에서 분석한 김부식의 신라혈통에 대한 자부심과 남성중심적인 유교적인 태도에도 비껴갈 수 없는 통쾌한 ‘팩트’인 것이다.
신라본기는 후대로 갈수록 반란과 민심이반의 형태를 더해간다.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것이 역사라지만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견훤과 궁예, 왕건이 등장하기 시작한 신라말기는 쇠락해 가는 신라왕조보다 새로이 나타난 세력들을 바라보는 관전평이 흥미진진했다. 또한 김부식이 속한 고려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이 돋보이는 닭살스러운 왕건에 대한 칭송으로 오글거렸지만, 후대에 씌어진 역사서라는 점을 일깨우는 ‘거리두기’를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는 부분이 되었다.
사족이지만 원문도 다른 고전보다 좀더 접근하기 쉬웠다. 어떤 부분은 궁금해서 원문 한자를 살펴보기도 했는데, 자주 쓰지 않는 한자가 있긴 했지만 쉽게 해석되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여러 모로 흥미진진한 천 년 역사 여행이었다. 김부식의 고구려, 백제 본기도 궁금하고, 무엇보다 열전이 궁금하다.
<인상 깊은 구절>
-시조 혁거세 거서간-
(18) 21년(기원전 37),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 불렀다. 이 해에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이 왕위에 올랐다.
✎ 고구려의 건국시기가 신라보다 늦은 시기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채호 선생님도 그랬고.
38년(기원전 20) 중국 사람들 중에 진(秦)나라가 일으킨 난리로 고생하다 동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마한 동쪽에서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들이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그것을 꺼려 책잡으려 했던 것이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본래 왜인으로,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이라고 부른 것이다.
✎ 도대체 누구 대한민국을 단일민족이라고 했던가?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 유입된 난민들과 왜인들까지, 고대사회는 조선시대보다 더 활발한 글로벌사회였던 것 같다.
-유리이사금-
(31) 14년(서기37), 무휼(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백성 5천 명이 투항해 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단 두 줄의 역사로 만나니 무척 새로웠다. 그리고 초기 신라의 분위기는 약소국이지만, 너그럽고 관대한 사회분위기를 가진 나라라는 느낌이 들었다.
-파사이사금-
(41) 2년(서기 81년) 3월, 임금이 주와 군을 두루 살펴보며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고, 감옥에 갇힌 죄수를 살피어 두 가지의 사형 죄에 해당하는 자가 아니면 모두 풀어주었다.
✎ 임금이 즉위할 때마다 대사면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알 수 있었다. 이런 행사들이 3.1절 특사, 광복절 특사로 이어진 듯하다. 그리고 궁금한 것은 두 가지의 사형죄라는 것이 무엇일까? 역모와 패륜(부모를 죽이는 등?)일까?
-지마이사금-
(48) 지마이사금[혹은 지미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파사왕의 큰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성부인이며, 왕비는 김씨 애례부인으로 갈문왕 마제의 딸이다. 앞서 파사왕이 유찬 연못가에서 사냥할 때 태자가 따라갔었다. 사냥을 마치고 한기부를 지날 때, 이찬 허루가 음식을 차려 대접하였다. 술기운이 오르자 허루의 아내가 어린 딸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다. 그러자 이찬 마제의 아내도 또한 자기의 딸을 데리고 나왔다. 태자가 그녀를 보고 기뻐하였으나 허루는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임금이 허루에게 말하였다.
“이곳 땅 이름이 대포(부엌)인데, 그대가 이곳에서 훌륭한 음식과 좋은 술로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해주었으니, 직위를 주다(酒多, 술이 많음)라고 하여 이찬 위에 두어야 마땅하겠다.”
마제의 딸을 배필로 삼았다. 주다는 뒤에 각간이라고 일컬어졌다.
✎ 성대한 연회와 음식, 그리고 딸까지 바치며 임금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허루는 갑자기 등장한 마제의 딸로 인해 딸을 태자비까지 만들지 못하지만, 이찬보다 높은 ‘주다’(뒤에 각간)라는 직위를 얻는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허루와 마제의 보이지 않는 암투와 라이벌 의식, 그리고 임금의 나름 지혜로운 처리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국사책에서 보았던 그 ‘각간’이라는 지위가 이렇게 쉽게 임의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놀라웠다. 어쨌든 마제 딸이 참 예뻤나 보다.
-내해 이사금-
(74) 27년(서기 222) 남신현의 사람이 죽었다가 한 달이 지나서 다시 살아났다.
✎ 어째서 이런 신기한 일들이 눈에 띄는지 모르겠다. 일연과 달리 신이한 일들보다는 이치가 합당한 이야기들을 주로 쓰는 김부식인데...
-첨해 이사금-
(80~81) 사관이 논평한다. 한나라 선제가 즉위하니 담당 관리가 아뢰었다. “다른 사람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낮추어야 하고 제사 지낼 수 없습니다. 이는 조종(祖宗)을 높인다는 뜻입니다. ~
신라에서는 임금의 친척으로 왕통을 이은 임금이 자기의 아버지를 왕으로 받들어 봉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자기의 장인까지 왕으로 봉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예법에 맞지 않는 일이니, 절대 본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
✎ 중국의 예법에 따르면 친척이나 다른 집의 양자가 되면 친부와 친모는 자신과 거리가 있는 사람이 된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예법이 남아 있어, 큰 집의 양자가 되어 그곳에서 자식 노릇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혹 들을 수 있다. 예를 따르는 것 같지만, 천륜을 거스르는 것 같아 비인간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직계 자손이 아닌 다른 이가 왕통을 이으면 친부나 친모를 ~갈문왕으로 봉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부식은 예법에 어긋난다고 했지만 훨씬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갈문왕도 엄청 많은데, 그 뜻도 알 수 있었다.
-유례 이사금-
(91) 14년(서기 297) 이서고국이 금성을 공격해 왔기에 우리 군사를 크게 일으켜 막았으나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이상한 병사들이 왔는데,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그들은 모두 귀에 대나무 잎을 꽂고 있었다. 우리 군대와 함께 적을 공격하여 깨뜨렸으나 그 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먼저의 임금이 陰兵(신령한 비밀군대)을 보내 전쟁을 도왔다’고 하였다.
✎ <반지의 제왕>이 떠오른 장면이다. 그래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역사서보다는 판타지같은 느낌이 든다. 역사와 환상을 오고가는, 그래서 현대사와는 다른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사관이 논평하는 부분이 무척 새롭다. 기록한 역사적 사실들이 객관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을 일부러 보여주는 고도의 주관적인 장치인 듯.
-내물 이사금-
(110) 사관이 논평한다.
아내를 얻음에 있어 같은 성씨를 얻지 않는 것은 구별을 틀림없이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노공이 오나라에 장가들고 진후가 성이 같은 네 첩을 취한 것을 진나라 사패와 정나라 자산이 매우 나무랐다. 신라의 경우에는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형제의 자식과 고종∙이종 자매까지도 모두 아내로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은 각기 그 풍속이 다르다고 하나 중국의 예법으로 따진다면 이것은 커다란 잘못이라고 하겠다. 흉노에서 그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간음하는 짓은 이보다 더욱 심하다.
✎ 성골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신라왕조의 근친상간은 익히 알려져 있으나, 이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은 처음 접하는듯 하다. 그런데 고려에서도 왕족간 근친혼이 많았던 것 같은데, 일부러 이런 의견을 강조해서 넣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눌지 마립간-
(111) 김대문은 이르기를, 마립(麻立)은 방언에서 말뚝을 일컫는 말이다. 말뚝은 함조(자리를 정하여 둠)를 뜻하는데, 그것은 위계에 따라 놓는 것이니, 임금의 말뚝이 주가 되고 신하의 말뚝은 그 아래에 배열되었다.
✎ ‘마립’이 말뚝이라는 뜻이 무척 새롭다. 위계에 따라 위치가 다르다니, 경복궁에 있는 품계석이 떠오른다. 품계석의 원조가 아닐런지?
-소지 마립간-
(127) 12년(서기 490) 처음으로 서울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자를 유통시켰다.
✎ 시장이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인 줄 알았는데, 왕명에 의해 생겨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대목이다. 그럼 그전까지는 여전히 자급자족이었나?
-지증 마립간-
(132~133) 사관은 논평한다.
신라왕으로서 거서간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차차웅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이사금이라 칭한 이가 열여섯 사람, 마립간이라 칭한 이가 네 사람이다. 신라 말의 이름난 유학자 최치원이 지은 <제왕연대력>에서는 모두를 왕이라 칭하고 거서간 등으로 칭하지 않았다. 혹시 그 말이 천박하여 칭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겨서일까? <좌전>과 <한서>는 중국 역사책인데도 오히려 초나라 말인 ‘곡오도’, 흉노말인 ‘탱리고도’ 등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신라의 일들을 기록함에 그 방언을 그대로 쓰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본다.
✎ 김부식의 의견 중 가장 명쾌하고 탁월한 의견이라 여겨진다. 물론 그 기준이 결국 중국으로 부터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신라의 일들을 기록할 때는 그 나라 방언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다는 태도가 자못 전문적이고 명쾌하게 생각된다.
(133) 3년(서기 502) 봄 2월, 명령을 내려 순장을 금하였다. 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다섯 명씩을 순장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금하게 된 것이다.
✎ 무섭고 불쌍하다. 서기 500년까지 왕이 죽으면 따라 죽었을 생목숨들을 생각하니.
(133) 4년(서기 503) 겨울 10월, 여러 신하들이 아뢰었다.
“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래 나라 이름을 정하지 않아 사라(斯羅)라가도 하고 혹은 사로(斯盧) 또는 신라(新羅)라고도 칭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新)’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羅)’는 ‘사방을 덮는다’는 뜻이므로 ‘신라’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또 옛부터 나라를 가진 이는 모두 ‘제(帝)’나 ‘왕(王)’을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 지 지금 22대에 이르기까지 단지 방언으로 칭하였고 존엄한 호칭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여러 신하가 한 마음으로 삼가 ‘신라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리옵니다.”
✎ 지증왕때 시작된 일이 꽤 많은 것 같다. 이후 순장에 대한 것도 그렇고, 상복, 얼음을 저장하게 하는 것, 선박이용제도, 그리고 우산국이 토산물을 바치기 시작한 것 등. 그리고 이사부가 이찬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우산국에 가짜 사자를 보이고 항복을 받은 일까지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읽는 맛과는 다른 느낌을 가졌다. 지증왕에 대해 국사책에서 배운 것과는 다른 친숙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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